[삼강만평(三江漫評) ⑲] 중국인의 청탁문화
[삼강만평(三江漫評) ⑲] 중국인의 청탁문화
  • 정인갑<북경 전 청화대 교수>
  • 승인 2013.03.2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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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다보면 다른 사람에게 무슨 부탁을 하며 신세를 져야 할 일이 자주 생긴다. 필자는 이런 문제를 일괄 ‘청탁문화’라고 일컬으며 중국인의 청탁문화는 한국인과 구별됨을 지적하고자 한다. 본문 중의 ‘중국인’은 중국의 주체민족―한족(漢族)을 일컫는다.

첫째, 중국인은 자못 느긋한데 반해 한국인은 너무나 즉흥적이다. 지난 몇 년간 북경 청화대학은 해마다 외국 유학생에 한해 5월 15일경에 입시시험을 치르고 6월 15일경 오후 3시에 시험 결과를 발표하곤 했었다. 그날 오후 3시가 조금 지나면 적지 않은 한국인으로부터 ‘오늘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라는 전화가 필자에게 걸려온다. 식사 때 당연 돈을 들여서라도 입시에 미끄러진 자식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미 늦어서 도와줄 방법이 없다.

중국인은 신세를 져야 할 사람과 평시에 느긋하게 친분을 지켜나간다.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할까?’라는 초청을 받는다. 식사 후 ‘무슨 부탁할 일이 있나?’라고 물으면 ‘아니! 무척 바쁜데 오늘 저녁 다행히 둘 다 여가가 있으니 술 한 잔 한 것뿐이야’라며 갈라진다.

이런 만남이 지속되다가 언젠가는 ‘우리 자식이 명년에 당신학교의 대학원생 시험을 치르려는데 좀 도와 달라’라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는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 죄송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이내 사라져 버린다. 부탁한 날 만은 식사대접을 안 하는 것이 상례이다.

둘째, 중국인은 청탁을 좀 은폐(隱蔽)적으로 한다. 청탁할 사람이 마작을 놀자고 하여 놀면 청탁 받은 자가 돈을 딴다. 뒤통수를 긁으며 ‘오늘은 운수가 나빠(手氣不好) 내가 빨렸지만 다음은 내가 이길 테다’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번에도 청탁 받은 자가 돈을 따기 일쑤다. 한국의 상황은 이렇지 않다. 어느 사업가가 골프장 건설권을 땄다고 하자. 그와 절친한 어느 정치인이나 권력가의 은행 구좌를 들춰보면 비슷한 기간에 거금을 입금한 기록이 나타난다.

직접 금품을 들여가며 부탁하였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거나 심지어 그가 법적 제재를 받게 되었어도 웬만하면 적발하지 않는다. ‘적발해 봤댔자 먼저 내 얼굴에 먹칠하고, 또 그 사람이 앞으로 다시 일어설지 누가 알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한국인 같으면 ‘내 입이 터지면 그 사람 끝장이야’라고 떠들던가 양심선언이다 뭐다 하며 이내 공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중국의 부정부패가 한국보다 훨씬 더 많겠지만 한국에 비해 중국이 조용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셋째, 중국인은 청탁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 필자의 어린 시절, 부친이 생산대의 책임자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한족 야채재배기술자가 우리 집에서 대사를 치를 때마다 꼭꼭 찾아오곤 하였다. 부엌구석에 꾸러미 하나 쑤셔 넣거나 삿자리 밑에 봉투 하나 밀어 넣고 어머니에게 눈꺼풀을 껌벅거리고 가버린다. 헤쳐 보면 돼지고기 둬 킬로 또는 현금 10원 정도 들어있다. 한 달에 1인당 돼지고기 석 냥(150그람) 배급 주고, 대사 때 2원 정도 들고 가던 그 시절, 여간 반가운 일이 아이었다.

그러기를 3년가량 지속되던 어느 날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기 자식을 생산대의 차부로 써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겠는가! 생산대의 차부는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좋은 일감이다. 부친은 물론 그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었다. “데머사니, 듕국 사람들 속이 하여튼 우리보다 깊어. 이런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 죄 돌 거 아니야!”라며 부친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청탁을 위한 느긋한 접촉에는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상기의 례로, 3년 후 자식에게 의외의 출로가 생길지, 그때에도 부친이 책임자 직에 있을지, 차부가 남아돌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못할지… 미지수가 적지 않다. 이는 어떤 프로젝트에 투자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가늠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모험에서 중국인은 결과에 지나친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행하는 확률이 퍽 크다.

한국인 같으면 식사 대접도 신세질 날의 직전에 한다. 식사를 하자고 약속한 후 신세를 질 필요가 없게 사태가 변하면 핑계 대고 식사를 그만두는 수도 있다. 심지어 식사 대접을 할 것처럼 하다가 먼저 신세를 진 후, ‘한번 잘 모시겠다’라고 하고는 외면해 버리는 수도 있다. 청탁문화의 차이는 결국 속이 깊고 얕은 데서, 즉 문화가 깊고 얕은데서 기인된다. 같은 한국인도 지역별로 속이 깊고 얕은 차별이 있다. 같은 중국인도 공자의 발걸음이 미치니 못한 남방인이 북방인 보다 속이 얕다.

북경 진출 모 한국 재벌그룹은 필자의 충고대로 신세질 중국인을 A급 8명, B급 8명, C급 8명으로 선정해놓고 느긋하게 친분을 지켜나가며 도움을 받고 있다. 친분을 지키기 위해 쓴 경비의 몇 배, 심지어 몇 십 배의 도움이다. 한국인이 중국인과 상대할 때 이런 청탁문화에 주의를 돌리기 바란다. 사실 한국인끼리도 이렇게 청탁하여 나쁠 것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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