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만평(三江漫評)-24] 위연구어, 위총구작(爲淵驅魚, 爲叢驅雀)
[삼강만평(三江漫評)-24] 위연구어, 위총구작(爲淵驅魚, 爲叢驅雀)
  • 정인갑<북경 전 청화대 교수>
  • 승인 2013.06.1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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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에 ‘위연구어, 위총구작(爲淵驅魚, 爲叢驅雀)’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물고기를 깊은 데로 몰고 참새를 숲속으로 쫓다’이다. ‘사람들을 적의 편으로 몰아주다’의 뜻으로 쓰인다. 광복 직후 국민당은 집권 여당이고 공산당은 ‘불법’ 야당이었다. 국민당은 400만(전쟁 중 끊임 없이 징병하여 누계 800만) 병력에 미국의 최신 장비로 무장했고 공산당은 90만 병력에 일본군에게서 빼앗은 허줄한 장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인심을 잃어 끊임없이 국민들을 공산당의 편으로 몰아주었으므로 1946~1949년 국민당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를 면치 못했다. 아래에 국민당이 어떻게 재중국 조선인을 공산당 편으로 몰아주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광복 직후의 만주를 살펴보면 남반부 전체와 북반부의 대도시는 국민당관할구역이고 나머지는 공산당 관할구역이었다. 조선인은 이 두 구역에 각각 절반씩 분포돼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국민당경향과 공산당경향이 각각 절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당 관료와 장교들의 부정부패는 국민당구역의 조선인들마저 공산당 쪽으로 몰아넣었다.

광복 직후 국민당정부는 자산접수위원회(資産接收委員會)를 설립하고 일본인의 자산을 접수하였으며 그 산하의 한교사무처(韓僑事務處)에서 조선인의 자산을 처리하였다. 일본을 등에 업고 횡재한, 말하자면 매판자산계급의 조선인은 극히 개별적이고(또한 그들은 거의 다 광복과 더불어 일본이나 한국으로 도망쳤고) 대부분이 정미소, 철공장, 술공장, 방직공장 등을 운영하는 소기업자들이었다.

상업이라 했댔자 원단, 양곡 장사꾼이 고작이고 규모가 작은 부동산업자들이다. 접수하여야 할 조선인의 자산은 극히 개별적이고 대부분은 접수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당 관료와 장교들은 횡재의 욕구가 극도로 달해 웬만한 조선인의 자산도 모조리 몰수, 자기의 지갑에 착복하였다.

필자의 고향은 국민당통치구역(요녕성 무순시)에 있었으므로 필자의 부모가 당한 국민당군대의 폭행과 약탈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장개석도 이는 접수가 아니라 겁수(劫收: 겁탈)라고 하였다: “많은 고급장교들이 접수 중에 횡재하였고 사치 방탕해졌으며 주색에 빠졌다. 장교는 교만해졌고 병사는 안일에 빠졌으며 기율은 무너졌고 투지가 없어졌다. 우리는 이 접수 때문에 실패하였다.”

동북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토비(마적)들은 조선인들을 일본 놈의 앞잡이라며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잔혹하게 죽였다. 백 명 이상 살해한 사건만도 수십 차례나 된다. 어떤 토비는 국민당 군대의 패잔병이고 어떤 토비는 공산당 소멸에 활용하려고 국민당 군에 편입시킨 것들이다. 그들은 정치토비이고 국민당과 같은 무리였으며 조선인을 공산당으로 몰아주는 데 ‘일조’하였고 국민당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공신’들이다.

국민당 정부는 또한 조선인을 일본침략자의 4촌쯤으로 취급하고(조선인이 반일한 것은 보지도 않고) 강제로 한국으로 압송하였으므로 조선인의 원한을 샀다. 광복 때 재중국 조선인은 합계 2,163,115명이었는데 강제 압송된 자가 70여 만 명이며 대부분 국민당 통치구역의 조선인이다.

국민당 통치구역의 조선인은 근근이 93,283명만 남았는데 그나마 국민당을 따르는 자는 별로 없었다. 후에 잘못 몰수한 조선인의 자산을 돌려주고 조선인에게 거류증을 발급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늦었고 조선인의 인심을 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와 반대로 공산당은 조선인에게 줄곧 우대정책을 실시했다. 1927년 10월 중공 만주성위를 설립한 이래 줄곧 조선족을 중국내 소수민족으로 취급하였으며 반제반봉건 투쟁의 의지 대상과 단결 대상으로 보았다. 또한 조선인도 중국인과 같이 토지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1928년 7월에 거행된 중공 제6차 대회에서 처음으로 조선인을 중국소수민족으로 취급할 것을 의논하였다.

광복 후 공산당은 그의 관할구역 내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조선인에게도 토지를 분배해 주었다. 1946년 5월4일부터 이런 토지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연변지역에서는 사실상 조선인에게 중국국민과 같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토지를 분배받고 공산군에 가입한 조선인이 62,942명, 8개 사단에 접근한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에는 여러 개 사단이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며 많은 가장 치열하고 어려운 전투를 조선인 부대가 감당하였다.

최근 몇 년간 필자는 <중국민족백과전서(全書)>를 감수하며 다른 소수민족은 중국공산당을 따르며 혁명에 목숨을 바친 열사가 보통 십여 명, 수십 명에 그치는데 조선인은 무려 3,943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였다. 그 원인을 추구하다 ‘민심은 천심’임을 재삼 느끼고 ‘위연구어, 위총구작(爲淵驅魚, 爲叢驅雀)’의 사자성어가 생각나 본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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