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뉴욕의 지하철에서
[Essay Garden] 뉴욕의 지하철에서
  • 최미자<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3.06.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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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사촌이 함께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으로 나가는 방법을 안내해 주었다. 시내의 유명한 패션의 거리 5가에서 내려 빌딩 숲을 걷고, 넓고 유명한 센트럴 공원도 잠시 들렸다. 또 은퇴 후 교외에 사는 용숙 친구는 뜰에서 나온 참나물과 반찬을 만들어 가져 왔고, 운전 잘하는 남편과 함께 맨해튼을 오후 내내 보여주었다. 복잡한 거리를 잠깐씩 들려 기념사진을 찍으며 다정한 우정에 가슴이 찡했다. 우린 길에서 만나도 서로 알아보기 어려운 45년이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금싸라기 땅 맨해튼은 자동차 주차장은 거의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의 직원들이 수천 달러씩 월세를 내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또 대학후배 경숙이가 매주 봉사하고 있는 식물원을 방문한 후, 그의 집에 들러 국화차를 마시며 열심히 살아가는 가정을 보면서 그동안의 궁금증을 풀었다. 두 아들을 자랑스럽게 길러놓고 잘살고 있는 여고 동창 정희는 금강산 식당에서 푸짐하게 맛있는 한식을 두번이나 대접해 주었다.

딸과 나는 일주일 시내 관람권을 사서 박물관을 중심으로 다녔지만, 지하도의 나쁜 공기로 기관지염을 앓기도 했다. 한번은 길을 묻느라 중심가 지하도에서 두명의 미국인 경찰과 함께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을 만나니 반가워 수다도 떨었다. 미국 경찰 테디(Teddy)가 뉴욕 경찰 배지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하루는 지하철에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준 미국 중년 아저씨의 여자 친구와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들었다. 젊은 날 멋진 한국여인을 놓쳐버린 아쉬움을 그가 우리 모녀를 만나며 30년 전만에 고백하니 아름다운 그의 추억으로 우린 모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젊은 남녀 한 쌍이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왔기에 나는 빨리 가방을 붙들어 주었다. 알고 보니 남자 친구랑 어머니 집을 방문하고 비행기를 타러 가는 코넬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었다. 수수한 인상의 젊은이들은 텍사스에 있는 직장으로 가는 길이란다. 나는 예전에는 나이가 든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이런 상황에는 서로 가방도 붙들어주며 살아갔는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젠 그런 좋은 풍습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그런데 크리스틴이라는 아가씨는 가방을 들어주어 고맙다면서 훈훈한 말로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게 아닌가.

“걱정 마세요. 제가 당신처럼 우리의 좋은 풍습을 지키도록 따라 할 게요”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밝은 미래가 상상되는가. 그래, 우리 세상은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 존재하는 거다. 대화를 하느라 우리가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통과해버려 시간을 조금 잃었지만 참 행복했다.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나의 자식 또래 같은 젊은 미국인이 벌떡 일어나며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역시 미국에도 인간답게 가정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 있다며 고마워하면서 나는 앉았다.

한편, 지난날 한국 방문 시에 서울역 지하도 계단을 오르내리며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끙끙 거리던 우리 모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나는 사람마다 바쁘게들 무표정하고 무관심하게 스쳐 갔다. 난 용기를 내어 어느 젊은 남자 분을 붙들고 좀 “도와 주세요”라고 청해야만 했다. 지하철에서도 한국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눈을 감고 잠을 자거나 모른 척 딴전을 피웠다. 나도 아예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자리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 얼마나 피곤할까. 젊지만 자네들이 앉아 가시요.” 사랑의 마음으로 자리를 양보했었다.

어른을 존경하던 도덕적인 풍습은 한국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는데, 훗날 젊은이도 반드시 어른이 된다는 진리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달라지지 않을 텐데, 어찌할꼬.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가 부디 영원히 이어지기를 꿈꾸면서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뉴욕의 지하철은 속도가 빠르기도 하지만 철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벽이 높아 무시무시했다. 지난해 한국인이 흑인과 다투다 떠밀려 떨어져 죽은 무자비한 사건이 상상이 되었다.

맨해튼의 가는 곳마다 외국관광객들의 물결은 대단했다. 세계의 거대한 수도를 걸으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연도 들으면서 우린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다양한 언어가 넘실거리고 아직도 많은 것을 구경하지 못하고 우리가 떠나야 했던 도시는 과연 명품이었다. 이제 나도 “아이 러브 뉴욕!”이라는 말이 절로 나 올 것만 같다.

[필자 소개] 교포월간지 ‘피플 오브 샌디에고’ 주필 역임, 수필집 ‘레몬향기처럼(2007년)’과 ‘샌디에고 암탉(2010년)’을 출간했고 한국문인 및 미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미수필가. 샌디에고 라디오코리아에서 ‘문학정원’ 방송 연출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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