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칼럼] 비석(碑石)
[詩가 있는 칼럼] 비석(碑石)
  • 이용대<시인>
  • 승인 2013.06.25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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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마당가를
서성인 슬픈 유혼(遺魂)이
그중에 맨 나중 것으로 가슴에서 떼어내어
긴 세월 꽂아두고 간 유일한 서편(書片)이다

대대를 거처 온 무성의 전언으로
바위보다 더 버거운
천명(天命)의 함구(緘口)

천만년 건널 수 없는
금단(禁斷)의 엄한 서기(瑞氣)로
그토록 뒤척인 한 가닥 향수마저
고이 접어 모르는 척 돌아서야 하는 곳

비가 와야 비로소
울 수 있는 너이기에
동구 밖 장승처럼 떠도는 넋 돌

깨진 입술 헌 소매로 천천히 문지르며
비문(碑文)을 안고 섰는
외로운 충절이다.

(이용대 제1시집/처음만나 그날처럼 96쪽에서)

 
한 사람의 일생이나 하나의 전언을 품고 침묵하며 서 있는 비망석(備忘石)을 본다. 생각한다고 다 말할 수도, 또 했다 해도 했던 말을 모두 남길 수는 없다. 다만 몇 자의 글로 세상에 유언을 기록한다. 가장 의미 있는 행적이나 뼈있는 어록을 돌에 새긴다. 말함으로써 오는 행적의 희석이나 남은 자들이 설왕설래하지 않게 함으로써 본뜻을 지키려한다.

그러한 조각(彫刻)글을 눈으로 읽고 다만 마음에 담는다. 눈물도 인정도 여기에 보탤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알아주기만 하면 되는 것, 그 이상으로 기대할 것도 없다. 우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로 갈수 없다. 가로놓인 시간의 벽을 허물수도 없다. 찾아오면 보여주고 아무도 지나지 않을 때는 홀로 서있다.

귀퉁이가 깨져 나가고 이끼가 끼일 정도로 오랜 계절이 흐른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세월을 견뎌온 외로운 넋이다. 비문과 비석만이 서로 부둥케 안고 오직 함께 있을 뿐이다. 다 무상(無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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