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통일분담금이 독일 통일의 최대후유증
[기고]통일분담금이 독일 통일의 최대후유증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0.10.1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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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에는 일관된 정책과 지도자간 신뢰가 중요

조명진<아디아컨설턴시 대표, 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전문역>

 
10월 3일은 동서 독일이 통일된 지 20년이 된 날이다. 그러면 독일 통일이 남북관계에 시사하는 바를 살펴본다. 우선 독일 통일을 유발한 베를린 장벽의 붕괴 요인들 중에 당사국 지도자들간의 신뢰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가간에 화해를 위해 당사국 지도자들간의 만남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외적 여건을 마련하는데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대통령의 관계가 그랬고, 대내적으로는 분단 독일의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의 지도자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다. 그 시작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간의 만남이었다. 1957년부터 1966년까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분단이 갖는 의미를 누구보다 깊게 경험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최장수 총리(1982년-1998)로 기록되는 기민당의 콜 총리는 집권 후 사민당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계승하였다. 콜 총리는 동독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고, 재임중 동•서독 정상회담을 열었으며, 인적•물적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이처럼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당적과 관계없이 콜 총리가 이어간 일관성을 보였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1975년 헬싱키 최종협정에서 유럽국가간 관계를 개선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를 도출해 내는데 겐셔 외무장관의 역할이 컸다. 겐셔 장관은 서방일변도의 외교를 동쪽으로 확대하여 동서균형과 화해를 이끌어 냈다.겐셔 장관은 베를린 장벽 붕괴 후, 통일독일의 나토 잔류, '2+4' 회담 등을 통해 동서간 균형을 유지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세바르드나제 외무상과 겐셔의 오랜 친분이 독일 통일 전후 난관들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겐셔 장관에 대해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겐셔 장관 스스로가 동독출신으로 1952년에 서독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즉, 겐셔 장관 스스로가 공산체제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유에 대한 갈급함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가 동독 외무상을 만날 때 더 허심탄회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겐셔는 외무장관직을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역임했다. 오랜 세월 외무장관에 있었던 만큼 정책의 일관성과 전문성을 지닐 수 있었다

이와 비교하면 한국의 경우는 매우 대조적이다. 1945년 한반도 분단이래 1994까지 김일성 주석과 첫 화해 무드를 연출한 것은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시절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 승계후, 화해 제스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과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었다. 2회에 불과한 정상회담에 장소도 두 번 모두 평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북 접촉의 실무진도 정권에 따라 바뀌었으며 한 정권 내에서도 단명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임동원 국정원장 그리고 김만복 국정원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독일인들에게 다시 하나의 독일로 합치기를 희망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까지 염원하게 만들었다. 반면, 서독의 동방정책과 비슷한 시기인 1972년 74남북 공동성명은 정권유지 차원에서 필요했었고,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연속성을 띄지 못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합의사항도 집권당이 바뀌면서 그대로 이행되지 않고 혼선을 빗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의 대통령 임기는 김영삼 정부이래로 5년 단임제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정부가 교체될 때 마다 새로운 대북정책이 나오는 일관된 정책을 펴지 못하는 맹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에서 보듯이, 국가간 대화 상대와 대화 채널의 일관성은 신뢰 회복과 신뢰 구축 면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독일처럼, 통일의 여건은 위로부터의 변화 추진과 민초들의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갈망이 합치될 때 무르익는 데, 북한의 경우 개방적이었던 동독사회와 크게 달라 북한 인민들 스스로의 변화시도는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독일통일의 가장 큰 후유증이 통일부담금이었다. 흡수 통합의 대가로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마르크화로 1:1로 바꿔준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독일경제가 통일 후에 휘청거리게 만든 주된 원인이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화폐교환의 정보를 미리 입수한 동독지도부는 동독조폐공사의 윤전기가 망가질 정도로 밤낮으로 마르크화를 찍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공식적으로 동독마르크화를 바꿔준다고 발표하기 전에 이미 암거래 시장에서 1:3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이를 두고 무모한 거액의 통일 비용이 지출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에서 독일과 같은 화폐교환은 상정하기 힘들다.

독일 일간지 베를린 자이퉁의 최근 여론 조사는 구 동독국민의 49 퍼센트가 동독시절이 좋았다고 밝히고, 서독 응답자의 25퍼센트와 동독 응답자의 12 퍼센트가 베를린 장벽을 다시 세우자고 했다. 이는 외관적인 통일은 이루어졌지만, 내면적인 통일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이다. 44년간 분단되었던 독일의 통합 과정이 이러함을 볼 때, 이제 분단 65년이 다 되가는 한반도의 통일 후 통합 과정은 훨씬 더 긴 세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경우처럼 남북한 정상간의 빈번한 접촉을 통한 지속적인 신뢰회복과 정권에 상관없는 실무진의 일관된 정책을 펼쳐가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을 공고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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