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47] 선진해양국 「고려」
[아! 대한민국-47] 선진해양국 「고려」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3.08.15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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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고려는 한민족사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 자주적 민족통일국가다. 첫 민족통일국가인 고려가 해양경영에 힘입어 일어난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태조 왕건은 해양 호족세력 출신으로서 건국 전에는 궁예 예하의 백선장군(百船將軍-해군대장)이었으며 건국 후에도 해군총관역을 맡아 건국의 기틀을 닦았다.

그 뿌리는 바로 해양왕국을 건설한 장보고의 해양경영이었다. 번성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서기 851년에 무너졌지만, 그에 의해 구축된 동북아 3국의 국제무역망은 사라지지 않고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 흐름을 타고 왕건의 해상세력은 70년도 안되어 후삼국을 통일하고 918년에 고려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고려는 발달된 자기 나름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구비하고 있었다. 1274년 여∙몽(麗蒙)연합군의 제1차 일본원정 때, 하까다(博多)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상황을 원나라측 기록인 「원사(元史)」는 이렇게 전한다. “원나라 전함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

”이 해전에 투입된 고려군 대선 한 척의 길이는 약 30미터로서 90명이 탈 수 있으며 쌀 3천석을 실을 수 있고 배의 무게는 250톤 가량이었다. 그로부터 240년 후에 서양에서 마젤란이 세계를 일주할 때 끌고 간 5척의 배 가운데 가장 큰 배가 130톤에 불과했으니 고려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 원정을 위해 고려는 ‘배 위에서 말을 달릴 만하다’고 하는 대형선박 300척을 포함해 모두 900척의 선박을 불과 4개월 만에 건조해 낸 위에, 거기에 최신식 무기까지 장착했으니 고려전함은 그야말로 무적함대였다. 고려배는 그 종류도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에 기술된 것처럼, 바닥이 평평하고 배의 앞뒷면을 유선형으로 만들어 그 위력을 배가시켰다.

고려는 이처럼 우수한 해운수단을 이용해 대외무역을 적극 추진했다. 태조 왕건은 무역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이른바 중상주의를 표방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8위의 무역대국이 되고, 조선(造船)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DNA의 현재적 발현이라 할 수 있다.

15세기 초 명나라는 바다로 힘을 뻗쳐 멀리 아프리카 남단까지 ‘정화함대’를 보내 국력을 과시하고 문물을 교류했다. 그리하여, 인도양과 서태평양을 한 세대 동안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영락제와 그의 뒤를 이은 홍희제, 선덕제는 이와 같은 해양정책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개국초까지 류큐, 필리핀, 일본, 대만과 교역했던 우리나라(朝鮮)도 바다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해금정책을 폈다. 그러한 정책이 쇄국으로 이어져 뒷날 어떤 결말을 가져왔는지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세계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우리의 나아갈 길이 바다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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