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연주자의 혼(魂)
[취재수첩] 연주자의 혼(魂)
  • 김양균 기자
  • 승인 2013.09.23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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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이희아와의 저녁 식사
 

아사(亞使) 직전의 유태인 사내가 통조림을 열고자 안간힘을 쓴다. 허기에 떨리는 손을 벗어난 깡통이 마룻바닥을 구르고, 회전을 멈춘 것은 서늘하게 닦여진 독일군 장교의 군화다. 얼어붙은 그를 버려진 피아노 앞으로 이끈 장교는 연주를 명령한다. 죽음 직전에서 유태인이 선택한 곡은 아이러니하게도 쇼팽의 ‘발라드 1번’. 혼을 담은 연주가 이어지자, 장교의 살의(殺意)는 사라지고 그는 곧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감독 로만 플란스키 2002년) 한 장면이다.

대중이 보고 싶어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란 사실 어느 정도 정형화(正形化) 되어 있다. 고급(高級) 문화의 전달자이자 창조자로, 또 고결한 예술혼을 간직한 예술가의 아름다운 다비드 혹은 비너스의 형상을 예상하는 것은 루키즘 또는 다양성이 결여된 우리 예술 문화의 토양 탓일지도 모른다. 연주자가 조각 같은 외모의 소유자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 '스타 피아니스트'의 탄생은 시간 문제다.

강남 모처에서 만난 스물아홉 살의 젊은 피아니스트는 식사 내내 눈을 반짝이며 쇼팽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희아’.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로 수년째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녀의 정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985년 7월9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의 신장은 103센티미터. 양손에 각각 손가락이 두 개, 허벅지 아래 다리는 아예 없다. 연주자로는 커녕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던 그녀를 피아니스트로 키워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다. 무남독녀로 응석받이로 키울 법도 한데, 그녀의 어머니는 달랐다. 혹독한 세상에 맞서기 위한 그녀만의 무기로 선택한 것은 바로 피아노. 유년 시절부터 피아니스트로 두각을 나타낸 이희아는 승승장구했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바로 이 부분이 불편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그녀의 연주에 환호할까. 실상은 장애인이,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는 연주자를 신기해 할 뿐인 것 아닐까.

사진 촬영차 동석한 자리에서 부탁도 전에 본인의 사인 음반과 책을 건네며 씩 웃는 그녀보다 손가락에 먼저 눈이 갔다. 그간 여느 피아니스트와의 경쟁보다 더 힘든 것은 ‘도대체 이 손으로 무슨 연주를 한다는 것인가’라는 편견이 아니었을지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피아노 앞이 아닌 자연인 이희아는 평범했다. 짧은 단발머리를 질끈 묶은, 당차고 주장 강한 또래 젊은이와 다를 바 없었다.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 ‘희망을 연주하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 등등. 그녀를 둘러싼 시각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대중의 심리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아닌지 확인해야만 했다.

이희아씨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싫어 7년째 그녀의 매니저 일을 보고 있다는 갈렙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연주자가 롱런하기 위해서는 연주 실력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감동 마케팅으로 뜬거 아니냐’는 일부 지적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서른을 앞두고, 피아니스트 이희아씨는 연주자로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습니까?”

그녀를 둘러싼 일각의 지적, 합리적인 물음으로 포장된 이 차별적인 질문에 그가 벌컥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연주자의 내적인 고민을 파고드는 듯 하지만, 그녀의 유명세의 실상이란 실력보다 소위 ‘감동 마케팅’에 기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못된’ 질문이었다.

그 순간 이희아씨는 본인의 음악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매니저는 예상과 다르게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연주자는 연주를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닙니다. 혼을 담아야 대중의 마음을 훔칠 수 있으니까요. 희아의 연주가 그렇지 않을까요?”

조만간 그녀의 연주회에 초대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얼굴이 붉어진 기자는 고개만 끄덕일뿐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 이희아와의 저녁식사는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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