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6] 무국적 한인의 고난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6] 무국적 한인의 고난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2.1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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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외교관계수립 이후에도 늦어지는 국적부여로 인해서 토지가 없는 비국적자(불법체류자) 한인들의 고통은 커져갔다. 또 5루블씩 하는 거주증을 소지하지 못한 한인들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서 고통을 겪었다.

사실상 절대다수의 한인들이 거주증 비소지자로서 러시아 경찰이나 관리들의 불법검문에 걸리면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토지를 분여 받지 못한 한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으며, 한인들 간에는 토지를 소유하고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원호인(러시아국적자)과 토지 없이 소작농이나 광산, 벌목장 등에서 일하는 여호인(비국적자)으로 나뉘어져서 양자 간에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20년간 가구당 최고 100데샤티나까지 토지이용을 규정해 왔던 1861년 3월 26일자 ‘아무르주와 연해주 러시아인 및 외국인 관련법’이 1900년 6월 22일자 법으로 폐지되어 러시아인 새 이주자들과 국적자 한인들조차도 단지 15데샤티나의 토지만을 분여 받게 되었고, 비국적자 한인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편 극동지역의 벌목장 및 광산 등지에서 중국인이나 한인들의 저임금으로 노동은 러시아인 노동자들의 불만을 야기 시켰다. 황색인종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던 운테르베르게르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는 황색인종들의 러시아 유입과 거주제한에 관한 안건을 중앙정부에 제기하기였다.

그 결과 중앙정부 국무회의 지시에 따라 열린 내무성 각부처간 협의회에서, 중국인들 및 한인들(조선국적)의 극동지역의 유입제한, 거주조건 및 절차에 관한 규정안이 마련되었다. 규정안에 따라 러시아 영사관에서 발행한 비자와 1년짜리 특별거주증을 소지하고, 무역이나 상업 활동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에 한해서만 해당지역으로 입국과 거주가 허용되었다.

또 중국이든 한인이든 10세 이상이면 거주증을 소지해야 하며, 거주증 가격은 인지세를 포함, 성인은 5루블, 10세-15세미만은 2루블 50코페이카였다. 거주증이 없거나 기간만료된 거주증을 소지한 중국인이나 한인들은 개인이나 민간, 국영업체에서 종사할 수 없으며, 위반시에는 10루블 미만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1884년 러시아와 조선 간의 수교이후에 20대 후반의 젊은이였던 정구연도 먹고살기 위해 러시아 땅에 들어왔다. 처음 발을 디딘 곳은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연해주 남부였다. 처음에는 포시에트와 추풍지역 등지의 한인 부농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하지만 토지 없는 설움과 지주들의 횡포 속에서 머슴살이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정구연은 아는 사람을 통해 아무르주와 자바이칼주 산악지대의 탄광, 금광에는 더 나은 돈벌이가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1910년 정구연은 얼마전 맞이한 아내와 함께 금광노동자로 동원되어 자바이칼주의 보다이보 금광광산으로 건너와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노동은 힘들고 열악했지만 평소에 성실하고 인자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정구연은 얼마 안 되는 액수이지만 받는 월급을 착실하게 한푼두푼 모아 나갔다. 그러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예쁜 딸 정안나를 나았다.

딸의 탄생은 정구연에게 큰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금광노동은 무척 힘들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먹고살 수 있었다. 정구연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허리가 휘도록 일을 했다. 그렇게 이곳에서 15년을 보냈다. 하지만 금광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작업장을 옮겨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1925년 정구연은 보다이보 금광산에서의 오랜 노동을 접고, 시베리아의 극한 추위가 기다리고 있는 소련방 야쿠치야(사하)자치공화국의 알단금광으로 가족과 함께 이동했다. 비록 정구연 본인은 소작농으로 광산노동자로 러시아 땅을 유랑했지만, 자식 농사만은 잘 짓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 그의 소망은 딸 안나를 통해 이루어졌다.

딸 정 안나는 야쿠츠크에서 8학년을 마치고, 이르추크츠 사범대학의 노동학원을 졸업한 후, 레닌그라드(성-페테르부르그)의 게르첸국립사범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에 러시아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무국적 한인들의 노동과 러시아국적 편입문제는 한인들 본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러시아 지역당국을 늘 괴롭히는 문제였다. 한인들의 토지분여와 국적편입 문제는 극동지방의 마지막 군사령관지사였던 곤다티 시기에 와서야 해결되었다.

1911년 3월 20일 극동지역의 식민화 문제의 논의를 위해서 열린 성-페테르부르그 회의는 무국적 한인들의 금광노동을 허락하는 대신, 토지 분여 없이 국적편입을 받아들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아가 1911년 3월 23일자로 ‘외국인노동자 사용제한 규정’을 최종적으로 폐지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1916년대에는 한인들이 우랄산맥 근처인 오비강 연안에서까지 진출해 나감으로써, 서시베리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캄차트카에 이르기까지 거주범위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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