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5] 우쉬토베의 겨울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5] 우쉬토베의 겨울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4.1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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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중순. 기다란 경적소리와 함께 열차가 브레이크를 잡는다. 한동안 열차가 움직이질 않는다. 호송 수비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전 정차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극동에서 한인들을 빽빽하게 실은 강제이주열차가 1차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한인들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모두가 지옥과도 같은 객차에서 벗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다 같이 내린 것은 아니었다. 사랑스런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어린 아이와 노약자들, 오는 도중 사랑하는 자들과 완전한 이별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어쩌면 잘 됐는지도 모른다. 지옥과도 같은 이곳에서 뼈가 부서져라 노동의 고통 속에 평생을 보내는 것보다는... 육중한 화물열차의 쇠문이 열리고 황량한 들판과 강한 햇살이 이주자들을 맞이한다. 여기가 어디일까? 누구도 말이 없다. 엄습해 오는 공포에 몸서리가 쳐진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 괴물 같은 강제이주열차는 요란한 기적소리와 함께 다시 전진하기 시작한다. 실려 온 사람들 중에 정 바실리와 김 마리야 가족도 눈에 띤다. 처음에는 카라간다시에, 다음에는 탈듸쿠르간주 카라탈구역에 재배치 됐다. 바로 카자흐스탄 남부의 우쉬토베이다.

한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며들 땅, 한인들의 청춘과 희망을 야속하게 집어 삼켜버린 곳, 황량한 우쉬토베 광야이다. 멀리에 프리모레츠촌이 보였다. 사방은 모래와 초원, 세 산봉우리뿐이다. 그래서 그 철도역을 우쉬토베(‘세 산’의 의미)라고 칭했다. 우쉬토베와의 슬픈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보이는 것은 갈대와 늪뿐이었다. 주변에 인가라고는 없었다. 가을의 스산한 바람, 하늘 밑에서 살 수는 없었다. 모두가 땅을 팠다. 살아갈 집, 땅굴집을 만들었다. 맨 손으로. 우선 어린아이들을 살려야 했다. 카라탈 강변에 땅을 파고 땅굴집들을 짓고 ‘집들이’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정 바실리도 아내 마리야와 함께 열심히 토굴을 만들었다. 여기서 죽기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땅을 팠다. 추위는 사정이 없었다. 깊은 새벽 건너편 토굴 속에서 칭얼거리던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심한 고열 속에 앓다가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다. 특히 토굴 속의 습기는 어린 아이들에게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적리, 학질 등과 같은 질환들이 어린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데려갔다. 야속하게도. 장례를 치를 관조차 없었다. 그렇게 습기가 베어나는 토굴에서 첫 밤을 보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937년 12월31일에도 4천 가구의 한인 이주민들이 카자흐스탄 쿠스타나이 기차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아이들과 함께 추위 속에 5~6일을 야외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당과 소비에트 기관들은 한인 이주민들을 수용하고 정착시키는데 특별한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한인 이주자들은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특별한 직업도 없이 취직도 하지 못한 채, 제대로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돼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병들었다.

후유증은 컸다. 1달여 간의 이동은 모두를 녹초로 만들었고, 모든 의욕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얼어서 죽고 굶어서 죽었다. 또 하나의 고통은 이산의 아픔이었다. 많은 이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 뿌려져 이산가족이 되어 있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흩어진 가족들을 찾아 얼마간은 헤매고 다녀야 했다. 살아남은 자들이 모였다. 신형문을 중심으로 콜호즈 조직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콜호즈는 만장일치로 ‘달니 보스톡’(원동)이라고 지었다. 이른 봄 우쉬토베의 들판 한 켠에 이름 모를 묘지들의 봉분에 덥힌 눈이 따사로운 봄 햇살에 녹아내렸다.

살아남은 자들은 어렵게 극동에서부터 조심스레 가슴에 품고 온 종자 꾸러미를 앙상한 손으로 들고 들로 나갔다. 농기구도 없다. 당국의 지원이 있기까지는 맨 손으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어떻게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이를 악물고, 첫봄을 맞기까지 젊음을 황무지 들판에서 보냈다. 오랫동안 눈앞에 어른거리는 고향을 돌아갈 수가 없었다. 1955년 정 바실와 마리야는 꿈에 그리던 고향 원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카자흐스탄으로 대략 9만5천427명(2만141가구)의 한인들이 이주됐다. 이중 가장 많은 수의 한인들이 남부카자흐스탄에 1만2천31명(8천693가구), 북부카자흐스탄에 4만1천425명(5천137가구), 독일계 및 폴란드 계 이주민 정착촌이 있는 서부카자흐스탄에 8천986명(1천139가구)이 정착했다. 극동에서 한인들이 남기고 온 재산과 농작물, 농기구, 가축 등에 대해 약속된 물질적 보상은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인들의 물질적 손실에 대해 당국이 발급한 교환증은 이주한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현지의 당이나 소비에트 기관들은 한인 이주민들을 수용하고 정착시키는데 특별한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특별이주한인들의 정착대책에 융통성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중앙정부로부터의 자금 및 농기구 지원이 늦어졌다. 그저 불쌍한 한인들에게 동정의 눈길과 빵을 건넨 것은 주변의 토착민인 카자흐인 농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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