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6] 황무지를 옥토로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6] 황무지를 옥토로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4.2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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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과정에서 한인들이 입은 물질적 손실에 대한 소련당국의 배상약속은 지연됐다. 콜호즈 내에는 식량과 자금이 부족했고, 이로 인해 한인 강제이주자들은 정착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현지의 당 기관들은 한인 이주자들을 수용하는데 특별한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으며, 특별이주민들에 대한 정착대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금부족과 중앙의 지연된 결정으로 한인이주자들은 고통을 받았다.

1937년 12월 9일 카자흐공화국 인민위원회의는 ‘한인이주민 이주 및 정착에 대한 특별결의안’을 채택하고, 정착계획과 이를 위한 비용, 주택건설, 생활공공시설 건설을 결정했다. 그러나 실행은 더디게 진행됐다.

이런 가운데 한인 이주자들은 극동에서처럼 곧바로 콜호즈 조직에 착수했다. 중앙아시아의 전 지역에서 한인 콜호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카자흐스탄주 카르막치구역에 조직된 <푸치 크 소치알리즈무> 콜호즈도 그중의 하나이다.

콜호즈 대표인 유가이 베.(Югай В.)는 1937년 10월 11일에 극동에서 자신의 콜호즈원들과 강제이주열차에 실려 카르막치 구역에 들어온 인물이다. 카자흐스탄에 도착해 2개월이 반이 지나 유가이는 제일 먼저 콜호즈 조직에 착수했다. 생존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푸치 크 소치알리즈무> 콜호즈는 주로 노동자들과 일부 사무원들을 비롯하여 80개 가정으로 구성된 적지 않은 규모의 콜호즈였다. 하지만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택건설과 농기계 보급, 자금지원, 식량지원 등, 농업활동과 생계에 필요한 지원과 정책은 느리게 진척됐다.

결국 콜호즈 관리위원회 대표 유가이는 “콜호즈원들이 1937년 9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못해오고 있습니다. 경리의 80세대 중 61세대가 식량대부(밀)로 156첸트네르를 받고, 19세대는 식량대부를 받지 못했습니다. 받은 밀로는 새 추수 때까지 부족하며, 식량대부를 받지 못한 콜호즈원들에게 식량보조를 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소련방 인민위원회 소비에트 위원장 몰로토프에게 보냈다.

황무지를 옥토로 가꾸어 나가는 한인들의 노력은 생존과 직결됐다. 이주 초기 한인 콜호즈들의 경제상황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 였다. 당국은 부족한 양이지만 식량을 지원했으나, 이 또한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벡공화국 지역에서는 지역당국자들의 실적올리기식 정책집행으로 지역 간에 차이가 나타나곤 했다.

1938년 8월 16일 크즐오르다주 케렌-우쟈크구역의 <칸톤 콤무나> 콜호즈의 김경석은 소련방 인민위원회 소비에트 위원장 몰로토프에게 “우즈벡공화국에 이주한 콜호즈원들의 일부는 100첸트네르까지 알곡을 받았는데, 카자흐공화국 지역의 콜호즈원들은 1킬로그램의 알곡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극동에서 알곡을 납부한 증명서가 있습니다. 우즈벡공화국의 한인 콜호즈원들과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해명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냈다.

따라서 콜호즈를 조직하고 1년이 지나도록 한인 콜호즈들의 경제 및 식량생활은 지극히 어려웠다. 식량부족으로 일부에서는 질병으로 시달렸다. 1939년 4월 24일 <트루드이르바> 콜호즈 대표는 이계옥, 이연근, 김순가, 한치구, 한 마리야 등의 한인 이주자들이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괴혈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으며, 수가 10명 이상이 넘는다고 파견 나온 내무인민위원부 젠기스키구 파견소원들에게 알렸다. 파견소원들은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내용과 함께 카자흐공산당 젠기스키 구 당위원회 바크라예프 서기에게 보고했다.

극단적인 생활환경 속에서도 한인 이주자들은 배고픔을 뒤로하고, 맨손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 결과 1939년 11월초 카자흐공화국 내에는 61개의 한인 집단농장에 6723가구, 7개의 협동농장에 806가구, 8개 어업집단농장에 22가구, 도시와 농촌의 기관 및 기업에 5945가구의 한인 강제이주자들이 정착할 수 있게 됐다.

간간히 카자흐인들과 우즈벡인들도 동정어린 눈으로 한인들에게 빵과 마실 것을 제공해 주었다. 한인들의 근면성과 농업기술은 주변의 민족들이 놀랄 정도로 큰 결과를 낳아갔다. 한인들이 오기 이전에 1근로일당 100그램의 현미를 생산해 내었던 우즈벡공화국 중치르치크 지구의 <노브이 푸치> 콜호즈에서는 한인들 이후에는 1근로일당 5킬로그램의 쌀을 생산해 내게 됐다. 한인들은 콜호즈를 부흥시켜 나가며 강제이주로 만신창이가 된 자존심을 회복해나갔고, 극동에서 누렸던 부를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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