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8] 콜호즈 ‘선봉’의 빛과 그림자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8] 콜호즈 ‘선봉’의 빛과 그림자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5.0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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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1월초 무렵에 카자흐공화국 내에는 어느새 61개의 한인 집단농장에 6723가구, 7개의 협동농장에 806가구, 8개 어업집단농장에 22가구, 도시와 농촌의 기관 및 기업에 5945가구의 한인 강제이주자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주택건설은 당국의 정책집행이 지연되는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계속됐다. 하지만 1938년-39년 시기의 흉년으로 집단농장에, 특히 한인들이 소속되어 있는 콜호즈들의 경제상황이 어려움을 맞기도 했다.

따라서 한인들은 제대로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주나 지역으로 무단 이주하는 경우도 발생하곤 했다. 한인들의 상황을 향상시키라는 지시가 중앙당국으로부터 계속해서 하달됐다.

하지만 각 공화국에서는 이주자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거나, 집단농장 결성 문제에 있어서 눈에 띠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택문제, 농업지원문제, 자금문제 등,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는 한인들의 황무지에서의 농업건설은 계속됐고, 여기저기서 그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서 1960년대 초까지 카자흐공화국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생산세포단위는 집단농장과 협동농장이었다. 예로 카자흐공화국의 쿠스타나이 주에는 연해주에서 이주해온 한인들이 200여가구로 구성된 <사미르> 와 <12월 5일> 콜호즈를 조직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크즐오르다주의 칠리지구에도 150여가구로 구성된 규모가 큰 한인 콜호즈들이 있었고, 이중의 하나가 벼재배 영웅 김만삼이 소속되어 있는 <선봉> 콜호즈 이다. <선봉> 콜호즈가 속해있는 칠리지구는 크즐오르다에서 남쪽으로 140킬로 떨어져 있으며, 콜호즈는 칠리지구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열악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선봉> 콜호즈는 초기 주택건축 과정에서부터 강흥식, 남정년, 김 타티아나 등의 우수일꾼들이 규정작업량을 평균 180.5%(벽돌 1000장씩 침)까지 실행해 나가는 성과에 힘입어 빠르게 콜호즈의 안정을 찾아나갔다.

1938년 9월에 콜호즈에서는 건축부분 총결산을 통해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콜호즈원들을 시상했으며, 김경삼, 박억응, 허류바, 김만삼이 일등상을 받았다. 특히 이후에 벼재배 부문에서 영웅적인 성과를 만들어 내는 김만삼은 과제를150%로 수행함으로써 농업이 아닌 건축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콜호즈 내에는 우수한 능력을 보유한 일꾼들이 많았고, 이는 콜호즈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콜호즈 내의 우수한 스타하노베츠(우수 일꾼)들인 김동준, 한 미하일, 김명용 등은 파종기간 동안에 배당된 작업량을 평균 285-473%씩 초과달성하며 실행해 나갔다. 또 김창욱이 지도하는 채소 브리가다(작업반)는 상반기 결산에서 콜호즈 순회우승기를 차지했으며, 파종과정에서 500%까지 작업량을 실행한 한 미하일, 박장록 등에게는 150루블에 해당하는 송아지 1마리씩이 시상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콜호즈 집행부는 우수한 일꾼들과 농업 브리가다에 우수한 성과에 상응하는 시상을 통해서 작업의 능률과 성과를 높여 나갔고, 가장 우수한 콜호즈 중의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선봉> 콜호즈가 특히 벼농사에 성공할 있었던 데에는 김만삼이라는 영웅이외에도 그에 버금가는 특출한 벼재배 전문가들이 많이 배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콜호즈 내에는 3개의 수농브리가다에 각 브리가다마다 3개의 생산분조가 있는데, 이중 김창세, 김이반, 김익세 분조는 특별한 방법과 관심으로 모를 심을 논을 준비하고, 98.5%의 발아력을 가진 볍씨들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 높은 수확을 거두어 내곤 했다.

2차세계대전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많은 한인 젊은이들이 정규군인이 아닌 노동군인으로 소비에트를 위해 희생하는 한편으로, 후방에서는 엄청난 생산력 증대와 기부금을 통해서 소비에트 시민으로서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선봉> 콜호즈의 교원들과 우체국 직원들도 3235루블어치의 공채권을 국방폰드에 기부했으며, 이중 중학교 교장 박창옥은 820루블어치, 교원 한봉호는 500루블어치, 이재인은 450루블어치의 공채권을 내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콜호즈의 성장과정에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어려움도 많았고, 내부적으로 불미스러운 일들도 발생하기도 했다. 한번은 콜호즈원인 유 표트르와 황춘국이 공금을 잠식하고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유 표트르는 콜호즈 집행부로부터 1주일 휴가를 받아 타쉬켄트에 다녀오기로 해놓고 나타나지 않다가 이후 자신의 가족을 빼내어 갔다. 게다가 유 표트르는 콜호즈에 85,81원의 빚과 국가대차로 가져간 가루 800,8킬로그램의 빚이 있다.

황춘국 또한 콜호즈 가루를 운반하면서 가루 75킬로그램과 마대 108개를 훔쳤으며, 콜호즈에 190.78루블을 빚지고 있으며, 국가대차로 가루 21킬로그램을 타고 갚지 않고 도주했다. 이외에도 쎌리뽀주임 김인섭(공청동맹원)은 소비에트의 상거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여 비난을 받았다.

김인섭은 상점에 신발 등의 여러 가지 생필품이 들어오게 되면 공개적인 판매가 아닌,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만 비공개 판매를 했다. 즉 지역 카자흐인들이 물건을 사러 오면 무조건 딸구어 보내는 등, 콜호즈의 이미지와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미스런 사례들이 콜호즈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한인 콜호즈들은 볼쉐비키적인 농업활동을 통해서 계속 발전해 나갔다. 콜호즈의 농업경제가 풍성해지면서 콜호즈 내의 문화생활 수준도 개선됐다.

콜호즈 중심에는 학교가 서있었고, 주변에 치료소와 산아소, 탁아소, 아동공원, 종람소, 구락부들이 생겨났다. 콜호즈마다 4-5개씩의 큰 축산 페르마가 있었고, 트랙터, 콤바인, 자동차 및 기타 농업기계들을 보유하게 됐다. 조직된지 3년이 지난 <선봉> 콜호즈의 거리 양편에도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났으며, 거리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중학교 건물 앞에는 과수원이 들어서 있었고, 공리사 앞에는 운동장이 위치해 있었다. 7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종람소에서는 콜호즈원들이 장기와 샤흐마트(장기)를 두거나 음악을 듣고, 벽에 걸린 지도를 연구하며 각종 서적과 신문을 즐길 수가 있었다.

또한 콜호즈원들의 주택지붕은 맑숙하게 회칠이 된 채 단장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선봉> 콜호즈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안드레이가 이끄는 이웃의 <기간트> 콜호즈와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최 표트르가 이끄는 야느이쿠르간구역의 <붉은별> 콜호즈도 안정을 찾아 나갔다.

특히 <붉은별> 콜호즈에는 6만루블을 들여 건축한 유희실과 독서실이 있는 구락부가 있었고, 구락부 앞에는 커다란 스탈린 동상이 서있었다. 이외에 오춘근이 이끄는 <십월의길> 콜호즈 또한 안정을 찾으며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콜호즈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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