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칼럼]추기경과 코스모스
[김정남칼럼]추기경과 코스모스
  • 김정남
  • 승인 2010.11.2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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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본지 고문, 전 청와대사회교육문화수석>


김정남 본지 고문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고 「야생초 편지」는 단언하고 있다. 다만 그 풀의 효능을 아직까지 인간이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제 나름의 아름다움과 덕을 갖추고 있지 않은 꽃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동쪽 울타리에 핀 국화는 일찍이 도연명의 사랑을 받아 은자(隱者)의 꽃이 되었고, 연꽃은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로 꽃 중의 군자가 되었다. 유배지 제주도의 보리밭 가장자리에 던져졌던 수선화는 추사(秋史) 김정희의 굄으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이르렀다.

김수환 추기경이 코스모스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쓴 몇 편 안되는 수필 가운데 ‘어머니, 내 어머니’라는 것이 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추기경의 심사가 담담하게 그려져 있는 이 글은 짧지만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어머니를 주제로 쓴 사모곡 가운데 나는 추기경의 이 글을 단연 으뜸으로 친다. 글은 이렇게 코스모스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가을 들녘이 보고 싶어 시골에 내려갔다. 어느 수도원 손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하늘아래 뜰 가득히 피어난 코스모스가 눈에 확 들어왔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그 모습이 얼마나 청초하고 아름다운지 옛 고향집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모습이 그 꽃밭에서 미소짓는 것만 같았다. 우리 어머니는 코스모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신데다가 젊었을 때는 분명 그렇게 수려한 분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이어간다. 김수환 추기경은 8명의 형제 자매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형이나 누이들은 가난과 잦은 이사 때문에 교육을 시키지 못했고, 오직 추기경과 바로 위 형님만이 그 나마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생활과 교육 모두를 어머니가 도맡았다.

추기경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는 언젠가 대구에 다녀오셨다. 아마도 그때 대구의 큰 성당에서 사제 서품식을 보고 오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형제 둘을 앉혀놓고 “너희들은 신부가 되라”고 하셨다. 이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곧 추기경과 그 형의 일생이 되었다. 형이 먼저 신학교로 간 뒤로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산 적도 있었다. 장사하러 가신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마루에서 석양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날이 많았다. 추기경이 남달리 석양을 사랑한 것은 그때 시절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 자식처럼 먹이고 입히셨다. 형제는 부잣집 아들 같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형은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닮았고, 김수환 추기경은 고모들이 “너는 어쩌면 꼭 네 아버지를 닮았냐”고 할 만큼 아버지를 닮았다. 그렇지만 추기경은 어머니야말로 자식을 낳고 기르고, 공부시키고 성직의 길로 가게 하신 분이라고, 풍수지탄(風樹之嘆)에 목이 메고 있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꽃

추기경은 어머니가 코스모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신데다가 젊었을 때는 분명 코스모스처럼 수려한 분이었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그 코스모스를 통하여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어머니를 그리는 것은 비단 어머니가 코스모스를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코스모스에는 분명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하는 힘이 있다.

시인 조지훈(趙芝薰)은 코스모스를 “차운 계절을 제 스스로의 피로서 애닲게 피어있는 꽃”으로 그리면서 “향방없는 그리움으로 발돋움하고 다시 학처럼 슬픈 모가지를 빼고 있다”고 읊었다. 코스모스의 큰 키는 영락없이 발돋움하고, 학처럼 슬픈 모가지를 뺀 모습이다. 이미 가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발돋움하고 모가지를 빼고 있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큰 키와 가녀린 허리를 가진 탓으로 아주 가냘픈 바람결에도 쉽게 하늘거린다. 한줄기 바람에도 저항하지 않고 그 바람결을 탄다.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결을 타는 것도 더불어 함께 일렁인다.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는 것처럼 더불어 함께 흔들리는 것이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청량한 바람을 타고 무리지어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노라면 내 비록 시인이 아니지만 물결 같은 그리움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코스모스는 확실히 밀려오는 그리움과 눈물겨운 기다림의 꽃이다.

코스모스는 멕시코가 원산지인 귀화식물로 구한말 개화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10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우리의 풍토와 기후에 알맞게 적응하여 이미 토착화된 꽃이다. 1784년, 서양종교인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와 갖은 신산고초를 겪으면서 나라의 개화와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면서 토착화되는 과정과 궤적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면서 로만 칼러를 하고있는 추기경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하는 분위기가 있다.

어디선가 코스모스를 다섯가지 덕德으로 예찬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박토에서 자라는 검소함, 나실나실한 가냘픈 잎의 소박함, 요염하지 않은 청초함, 비바람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함, 칼칼한 가을 맑은 공기에 피는 기품이 코스모스의 다섯가지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코스모스에게는 저홀로 피고 지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아련한 그리움으로 이끌어 사람들의 둔탁해진 마음을 착하고 맑은 마음으로 순화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가을 들녘,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나로 하여금 문득 김수환 추기경을 그립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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