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8] 더 넓은 농토를 찾아서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8] 더 넓은 농토를 찾아서
  • 한국외국어대학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
  • 승인 2014.08.0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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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까지 농업생산성을 올리며 농업적인 성과를 거두어 왔던 중앙아시아지역의 콜호즈들이 1960년대 들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는 소련중앙당국의 중앙아시아 처녀지 개간을 비롯한 농지면적 확대조치와 관련이 있다.

1953년 9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앙아시아의 농업과 축산업, 기계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결정을 내렸다. 농업의 기계화를 위한 당국의 지원이 시작됐고, 중앙아시아지역의 공업화도 장려됐다. 또 기계화와 공업화를 진행할 전문가 양성을 위해 공업직업학교와 농업기계화학교들이 설립됐다.

많은 한인 젊은이들이 이 부문에서 공부를 했으며, 기계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1956년 개최된 소련 제20차 공산당대회에서도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실행될 제6차 5개년계획에서 중공업발전과 농업생산을 증가시키는 것이 결정됐다.

이 결정은 중앙아시아 콜호즈 한인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즉 콜호즈의 전반적인 균형 있는 발전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부유한 콜호즈와 그렇지 못한 콜호즈들 간에 통합이 이루어 진 것이다. 김병화 콜호즈의 경우도 이해 해당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콜호즈 간의 통합은 콜호즈의 경영악화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부유함을 유지해 왔던 한인 콜호즈들이 경영상태가 나쁜 콜호즈들의 채무까지 떠안으면서 통합된 콜호즈들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한인 콜호즈원들이 콜호즈를 떠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콜호즈를 떠난 한인들은 <고본질>이라는 계절농업을 위해 토지가 비옥한 러시아의 볼고그라드나 카프카즈, 우크라이나 등지로 떠났다. <고본질>은 농민이 소속된 콜호즈를 떠나 다른 지역에 가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판매한 후, 소속 콜호즈로 돌아오는 형태로 주로 3월에서 10월 사이에 이루어지는 계절농업방식이다.

<고본질>은 한인들의 독특한 농업경영형태로 이미 2차대전 이전부터 생겨났으나, 1958년 MTS(기계트랙터보급소)가 폐지되면서부터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고본질>은 개인단위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소공동체 단위로 운영됐다. 사실 이시기에 소속된 콜호즈를 벗어나는 것은 불법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고본질>은 고생하는 만큼 많은 수익을 보장해 주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콜호즈 한인들이 <고본질>을 위해 유라시아와 타공화국들로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단순한 <고본질>이 아닌 농업정착을 위해 이주해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오 스베타(43)도 1966년에 볼고그라드에 이주해 들어온 사람이다. 많은 어려움을 딛고 지금은 김치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30여 가지의 김치를 생산해 내고 있는데 현지인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인들이 볼고그라드지역으로 떠나는 데에는 단지 비옥한 토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지역은 이미 제2차세계대전 이전부터 한인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지역 이외에도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에 3천명, 야쿠티야공화국에 80명, 몰로토프주에 455명, 이르쿠츠크주에 122명 등, 적지 않은 수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전쟁발발 무렵에 볼고그라드에 거주하던 대다수의 한인들은 자체적으로 카자흐공화국의 구리예프주와 우즈벡공화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한인들의 불법적인 <고본질>이 계속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고본질> 한인들과 콜호즈 간의 나름대로의 숨은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정상적인 콜호즈 운영으로는 국가의 요구량을 채울 수 없었던 콜호즈는 <고본질>을 통해 얻는 수익의 일부를 받아 국가의 요구량을 채우고, 나머지는 <고본질> 농민이 소유하도록 눈을 감아주었던 것이다.

사실 <고본질>은 한 해 농사를 망치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될 정도로 위험성이 높은 농업방식이었지만, 높은 수익을 보장해주는 <고본질>을 한인들은 계속해 나갔다. <고본질>은 한인들의 재산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이는 한인들이 도시로 이주해 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는 원천이 됐다.

한인들의 도시거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했고, 1980년대에는 한인들의 80%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본질>의 결과로 1960~80년대부터 남부 러시아의 볼로그라드와 우크라이나 등지에는 또 하나의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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