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33] ‘곡물왕’ 장 류보미르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33] ‘곡물왕’ 장 류보미르
  • 한국외국어대학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
  • 승인 2014.10.1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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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의 붕괴로 정치적, 경제적인 상황이 악화되며 과거 소련지역 내의 한인사회는 또 한번의 시련을 맛보아야 했다. 중앙아시아지역의 구성공화국들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은 다시한번 국적과 정체성의 변화를 겪어야 했고, 부활하는 민족주의의 희생양이 돼야 했다.

많은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를 벗어나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유라시아지역 등으로 다시 이주해가기 시작했다. 심각한 경제난은 빵 한 덩어리를 사기위해 긴줄을 늘어서야 할만큼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인들은 점차 삶을 안정시켜나갔다. 특히 1950년대부터 유라시아지역의 모스크바와 그 주변도시로 진출한 후, 고생 끝에 성공신화를 이룩하는 한인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공한 인물들은 한인이나 러시아인들 모두에게서 인정을 받았으며, 한인사회를 단합시키는 구심적인 역할을 했다.

2003년 7일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공천으로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의원에 당선된 유일한 한인의원 장류보미르(47)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러시아 한인 3세인 장류보미르는 1959년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서 9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났다. 조부(祖父)가 연해주에 이주정착 이후에도 장 류보미르의 집안은 넉넉하게 살았다. 하지만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면서 집안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래서 류보미르는 빵 한번 배불리 못 먹을 정도로 지독히도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배고픈 장류보미르에게는 중등학교시절의 한인이기 때문에 맛보아야 했던 아픈 기억들이 남아있다. 선생은 툭하면 류보미르를 벽에 기대서게 했으며, “공부도 못하는 녀석이, 카레이츠(한인) 주제에, 어차피 농사나 지으며 살건데....”라며 류보미르를 모욕스럽게 대했고, 이는 두고두고 어린 류보미르의 가슴 속에 한으로 남아있어 왔다.

이후 중등학교를 마친 류보미르는 카잔대학에서 엔지니어 과정을 마치고, 1981년 아무 연고도 없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에 자리를 잡았다.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러시아 3대 산업도시중의 하나로, 장류보미르는 러시아인들 틈 속에서 악착같이 일하며 기반을 잡아나갔다.

그는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서 처음에는 양파재배도 했고, 택시기사, 노점상, 심지어 거리의 악사노릇까지도 해보았다. 무엇보다 참기 힘든 것은 소수민족 한인에 대한 편견과 멸시의 시선이었고, 이로 인해서 성공 문턱에서 좌절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러시아 여인과 결혼을 했지만 한인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장류보미르의 성공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런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수민족 한인에 대한 편견과 모욕도 장 류보미르의 성공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노력을 꺽지는 못했다.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해 있던 류보미르는 마침 식탁에 놓여있던 한 덩어리의 빵을 보고 ‘바로 저거다’라는 생각이 떠올랐으며, 이후 제빵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씩 계획을 실천해 나갔다. 류보미르는 1990년대초 식량사정이 극도로 열악했던 러시아에서 경영혁신을 통해 빵공장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으며, 류보미르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시(市) 인근에 3개의 제분회사와 1개의 제빵회사를 거느린 린덱 그룹의 회장이 됐다. 종업원은 3000여명, 매출액은 6000만달러(약 720억원)에 달하며, 이 지역 밀가루 공급의 96%를 차지,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400만 인구를 먹여살리는 제빵업계의 제왕(帝王)으로 불리고 있을 만큼 그는 성공했다.

그는 또한 카자흐스탄 등 곡물산지에서 연간 65만톤의 밀․보리를 사들여 다른 지역에 파는 곡물 유통업도 하고 있다. 지난해(2003년)에는 니즈니 노브고로드 지역의 곡물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한 공로로 푸틴 대통령에게서 23개의 루비 보석이 박힌 고급 시계를 하사받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푸틴의 시계를 선물받은 사람은 100명에 불과하다. 장류보미르는 ‘빵의 소중함을 모르는 자는 인생을 모른다’는 신념으로 배고픔과 편견을 딛고 성공신화를 일구어 내었다.

장류보미르는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998년에 니즈니 노브고르드주의 주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2003년에는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공천으로 한인으로는 유일하게 국가두마(하원) 의원에 당선(12월 7일)됐고, 현재 하원 농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인구 200만명에 한인이 1천여명밖에 살고 있지 않은 곳에서 류보미르의 국회의원 당선은 다시 한번 주위를 놀라게 만들었다. 장류보미르는 한인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순수한 러시아인 사회에서도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장류보미르는 국가두마 의원 당선 이전부터 2차례나 주의원을 연임하고, 니즈니 노보고로드 고려인협회장을 지내며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해 왔다. 무엇보다도 그는 러시아 한인사회의 양대 큰 조직인 ‘고려인연합회’(회장 텐세르게이)와 ‘러시아민족문화자치회’(회장 조바실리) 간의 화합을 이끌어 내었다.

류보미르는 한인들의 열망을 담아 러시아 정부측에 적극 의사를 전달하는 등 힘을 쏟았고, 그 결과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 기념행사가 러시아정부의 공식적인 지원 속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되도록 했다.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는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여놓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러시아 내 한인들의 위상과 소수민족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장류보미르는 비록 한때는 한인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지만,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 모국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따금씩 그는 된장찌개와 김치를 먹고 ‘칠갑산’,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의 한국가요를 부른다.

1991년에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시에 러시아 최초의 태권도 클럽을 만들기도 했고, 제분회사 내에는 지역 한인들이 한국의 노래, 무용, 역사, 전통예절을 배울 수 있는 한국문화센터도 설립했다.

이 같은 공로로 류보미르는 2000년 12월에는 대한민국 김대중 전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장류보미르는 현지 한인들의 희망이 돼주고, 러시아 한인사회와 할아버지의 나라와의 교류증진에 다리 역할을 해나가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도 힘차게 개척의 성공신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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