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산책②] 영국의 통일 이야기(상)
[통일산책②] 영국의 통일 이야기(상)
  • 이명희 국립공주대 교수(역사학)
  • 승인 2015.06.0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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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 왕조의 전개와 국가적 통일의 기초 확립

▲ 이명희 국립공주대 역사학과 교수.
선진화의 과정은 ‘근대국민국가’의 형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국민국가는 국민통합의 기초 위에 수립된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UK(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로부터 탈퇴·독립을 위한 주민투표(2014.9)가 실시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은 복합적 국민으로 구성돼 있다.

영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실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통일 국가를 이룩했고, 그 통일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선진화를 이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이미 9세기 초에 웨섹스의 에그버트 왕이 잉글랜드 통일의 길을 열었으며, 그 후 9세기 중엽 데인인의 침입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알프레드 대왕을 중심으로 7왕국 시대의 전란을 통일하고 안정을 이룩했다.

그리고 1066년에 프랑스 지역의 노르만들에 의해 잉글랜드가 정복(노르만 정복)되면서 잉글랜드의 통일은 더욱 굳건히 됐다. 특히 노르만 왕가의 헨리 2세(1154~1189년)는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인 엘레아노르(Eleanor)와 결혼하여 프랑스 서부의 넓은 지역과 잉글랜드를 잇는 플랜태저넷 왕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왕조적 통일은 내적으로는 노르만의 봉건적 전통에 의해 봉건 영지와 지역들로 나눠지게 됐다. 그리고 각 지역 백성들의 사회·경제적 생활은 상호 연계되지 못했으며 단일한 국민 의식도 형성되지 않았다. 필자가 본고에서 말하는 통일도 이러한 전근대적인 왕조적 ‘통일’이 아니라 근대적 통일 혹은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을 의미한다.

영국에서 국민국가의 단초는 ‘100년 전쟁’과 ‘30년 전쟁’을 통하여 마련됐다. ‘100년 전쟁’의 결과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플랑드르의 모직물 기술자들이 대거 영국내로 이주함으로써 모직물 공업을 통한 경제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또한 전쟁 후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장미전쟁(1455~1485)을 겪으면서 봉건귀족들이 몰락하게 됨으로써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국민국가(國民國家) 형성의 기초가 마련됐다.

나아가 30년 전쟁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웨일스(Wales) 출신 헨리 튜더가 승리하여 영국왕 헨리7세(1485∼1509)로 즉위함으로써 듀더왕조가 시작되고 웨일스인들도 잉글랜드와의 통합을 받아들이게 됐다.

특히, 튜더왕조의 제2대 국왕 헨리 8세(1509년~1547년)는 1534년에 ‘수장령’을 발표하여 로마교황청에서 독립된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를 창립했고, 1535년 제정된 연합법(Act of Unions)에 따라 웨일스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잉글랜드에 통합했다. 나아가 아일랜드를 재정복하여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 국왕의 통치를 선언하고 국왕으로서는 최초로 아일랜드 의회를 예방했다. 이로써 헨리8세는 영국 역사에서 국민 공동체의 태동이라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튜더왕가의 왕권은 헨리8세에 이르러 전제적인 성격을 띠게 됐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녀의 치세 중에도 이미 청교도에 의한 국교회 비판이나 의회에서의 절대주의 비판이 있었다.

이것은 곧 근대적 국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죽게 되자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 출신인 제임스 1세(1603∼1625년)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하게 됐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일을 추구하여 스스로를 그레이트브리튼의 왕이라고 칭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기를 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국기를 만들었다.

이로써 근대적 국민국가에 한발 짝 더 다가가게 됐다. 그러나 제임스 1세 시대의 통일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공통의 왕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의회와 정부를 가진 ‘왕관연합(Union of the Crowns)’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는 영국 의회 그 자체를 부정하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창했다. 이에 대항하여 시민 측에서는 법률가 E.코크를 중심으로 ‘법의 우월’을 주장함으로써 의회와 영국은 사실상 분열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진정한 통일은 시민계급과 절대왕조 사이의 통합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튜더 왕가의 절대주의 하에서 이미 영국은 국가적 통일의 기초가 확립됐으며, 근대 국민국가와 선진화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채비가 갖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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