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⑤] 이진영 회장 "이집트 엘리트에게 한국발전 경험 강의]
[나의 해외개척기⑤] 이진영 회장 "이집트 엘리트에게 한국발전 경험 강의]
  • 이진영 전 이집트한인회장
  • 승인 2015.09.03 1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엘아리비그룹과의 인연도 깊어...이집트는 기회의 땅 확신
▲ 이진영 전 이집트한인회장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3시간 거리를 동그라미로 그리면 러시아, 유럽, 아프리카, 중동의 대부분이 그 안에 들어온다. 내가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며 16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던 이집트에서 내 삶의 후반부를 맞은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집트의 북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가 있다. 서쪽으로는 리비아가 있다. 말로만 듣던 세계 화약고의 중심지역이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내가 이곳으로 날아와서 새로운 삶을 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세계사 교과서나 지리 교과서에서 들어봤음직한 나라, 스핑크스와 피라미드의 나라, 낙타와 사막과 모래가 가득한 나라에서 한국인인 내가 우리 가족을 이끌고 산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나는 한국에서 1952년에 태어났다. 2015년 올해 환갑을 훌쩍 넘긴 63세다. 요즘은 그 정도의 나이를 노인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나 역시 노인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집트에 온 것은 마흔 세 살 되던 해였다. 당시 어린 아이들과 아내를 이끌고 카이로 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이 나이에 이르도록 남은 인생을 이집트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막연하게나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날의 공항에서의 낯설고 건조한 공기는 의외로 낯설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1978년 LG에 입사해서 만 20년을 이른바 LG맨으로 생활했다. 대기업 생활과 안정된 가정을 꾸리며 생활하던 내가 외국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은 이집트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1985년 LG전자의 미국법인으로 파견 근무하게 되면서 7년간의 미국생활이 시작됐다. 두 명의 아이들은 현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파견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것은 1992년이었고, 귀국 후에는 과천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적지 않게 나의 귀국생활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아이들의 교육문제였다. 미국에서 공부하였던 아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의 학교와 수업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를 보고 깊은 고민을 했다. 이미 7년간을 미국식으로 교육받은 아이들이었다. 이들에게 한국 학교는 낯선 환경이 돼 있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차에, 1995년 이집트의 파나소닉 현지법인으로 파견발령을 받았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다시 한국을 떠나는 짐을 쌌다. 그리고 이집트의 카이로 공항에 발을 내렸다. 낯선 곳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보다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잘 된 선택일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이집트는 미국과는 많은 것이 다를 것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말이다.

당시 내가 이집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집트는 이슬람국가로 가난하며 치안문제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집트행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주저하는 타입의 성격이 아니다. 적어도 아이들을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교육환경을 벗어날 수 있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는 결국 카이로 행 비행기에 가족들과 함께 몸을 실었던 것이다.

여하튼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이집트로 온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내 캐리어에서도 그렇지만, 내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나와 동시대의 부모들은 사실 아이들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모든 일에 가족을 제일 먼저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귀따갑게 들어왔던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가르침처럼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면 집을 어디로도 옮길 수 있던 것 아니던가.

지금 우리집 큰 아이는 미국의 미시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리고 작은 아이는 미국 코넬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고는 졸업해서 지금 샌프란시스코 구글 본사에서 데이터 분석관으로 일하고 있다. 어려운 교육환경 속에서도 기대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해 준 아이들이 대견하다.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집트에서 7월 중순은 섭씨 40도를 넘는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이 기간을 피해 나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이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보름간의 휴가를 가졌다. 최근 이 여름휴가는 나의 인생에서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마도 늙어간다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넉넉하게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나마 공부하는 아이들과 함께 이 정도나마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내게는 축복과도 같은 날들이었다고 하겠다.

이집트에서 생활한 지 10여년이 지난 2004년, 이집트 파나소닉의 현지법인이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은 IMF등을 겪으며 어려움 속에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이집트 파나소닉 현지법인에 근무하던 내게도 그 여파가 닥쳤다. 이제는 더 좋은 기회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려울수록 새로운 공부가 필요했다. 마침 카이로에는 미국의 여러 대학들과 연계하여 수업할 수 있는 과정이 개설되어 있었다. 나는 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의 MBA 과정을 자비를 들여 공부할 수 있도록 파나소닉 회장님께 부탁을 드렸다. 늦은 공부를 마음먹은 데는 어쩌면 이집트에서 남은 인생의 후반기를 제대로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같은 것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부터 나는 주경야독을 했다 오후 5시부터 9시반 까지 해야 하는 공부시간을 근무를 하면서 제대로 맞추기는 어려웠지만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수업을 빼먹어야 했고, 시험마저 제시간에 치루기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공부만큼은 최선을 다했다.

이런 노력은 어느 순간 결실이 되어 찾아왔다. 당시 나를 가르치던 교수님이 이집트의 총리를 내게 소개해줬다. 더운 나라에서, 이슬람의 나라에서 사는 아시아에서 온 작은 몸집의 남자를 눈여겨 봐 주신 것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려는 나의 태도를 높이 샀기 때문이라는 교수님의 말이 반만 사실이래도 나의 공부는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게다가 이집트의 총리를 직접 소개해주는 일은 이례적이고 파격적이기까지 한 일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한국의 성공적인 사회발전을 모델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국은 짧은 시간에 많은 기적적인 사회발전을 이루었고, 세계 속에서 선진국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IMF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이집트인들에게는 놀라운 모습으로 비쳤던 것이다.

총리실을 찾은 나는 뜻밖에도 “안녕하세요”라는 우리말 인사를 받았다. 그 감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날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러면서 중요하고 뜻 깊은 제안을 받았다. 총리실 산하에 SFD(사우디 개발기금) 연구기관이 있는데, 이 연구기관에 정기적으로 나와 강연을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한국사회의 경제발전과 눈부신 성장에 대한 성공적인 발전모델을 이집트 기업에 적용하는 아이디어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이집트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기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나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이집트 현지법인에 근무하던 나에 대한 평가가 파나소닉 본사에서도 높아졌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9년부터 2004년 사이에 나는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 굉장한 성장을 이룬 것 같다. 때 늦은 공부에 강의까지 하게 되면서 한국인으로 해외 생활에서 가장 가슴 뭉클한 경험도 더불어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집트에서 한국의 축구경기나 올림픽경기를 보다 보면, 함께 보던 현지인들이 가끔씩 질문을 한다. “한국 선수들은 왜 우는가?” 그들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왜 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국 사람들이 국제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 시합에 이기거나 져서 기쁨이나 안타까움에 눈물을 짓는 것을 이집트인들은 별로 공감하지 못한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어쩌면 국가관보다 종교적 가치가 더 우월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국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보다는 신에 대한 공경이 앞선다. 우리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애국심이나 형제의식과 동료애는 이집트인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집트의 고위 관료들은 쉽게 스스로에게 냉소적인 경향도 보인다.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집트는 희망이 없다”라는 말을 하는 이집트인 교수들도 종종 만난다. 문맹률이 70퍼센트에 육박하고 국민소득도 낮은 이집트가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집트에는 한국인이 1천여 명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여행사나 식당, 가이드 등으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쟈스민 혁명의 영향으로 최근에는 한국 관광객이 대폭 줄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7년까지만해도 이집트는 한국인에게 가장 가고 싶은 나라 가운데 1,2위를 다투었다. 한 해 평균 4만 명의 한국 관광객이 찾던 나라가 이집트였다. 하지만, 이제는 여행을 기피하는 나라가 돼 안타까울 따름이다.

얼마 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이집트를 방문해 연설을 했다. ‘한국을 따라 배우라’(Try to follow South Korea)라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또한 최근에는 LG전자와 삼성전자가 이집트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해 한국에 대한 관심은 다시 크게 높아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일이다. 이집트를 찾는 관광객 중에은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나일강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발상지를 찾는 부류도 있지만, 그보다는 종교적 순례여행으로 오는 이가 훨씬 많다. 이집트는 한국의 교회들이 선호하는 성지순례의 첫 방문지였지만 최근에는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대폭 줄었다.

엘아라비그룹은 한국의 삼성에 버금가는 이집트의 최대 그룹이다. 이 회사는 지난 42년간 일본의 도시바와 제휴를 맺고 있다. 이집트에서 일본의 도시바는 전자시장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도시바는 일본에서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 만큼 어려운 시절에도 이집트에서만은 시장점유율의 최대를 기록하며 든든한 기반을 과시해왔다.

이 엘아라비그룹의 총수는 이집트의 상공회의소 회장을 20년째 하고 있다. 아프리카 중동에서는 회장이 바뀌는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내가 2004년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해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 엘아라비그룹의 회장님이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의 제안이 파격적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우리 회사에 맡길 테니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제안이었다. 아마도 SFD에서의 강의를 전해 들었지 않나 싶다. 그 아들은 그 후, 1년 동안 우리 회사에서 배웠다. 지금 그는 엘아라비의 사장이 돼 있다. 이 일로 나는 엘아라비그룹의 사업파트너를 만들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LG그룹의 LG화학이나 GS칼텍스 등의 원료를 공급하는 일도 도울 수 있게 된 것도 이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같은 기회를 얻은 것도 주경야독을 하며 일한 바탕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집트 총리실의 소개로 SFD에서 한국의 성공 경험을 강의하던 시절 전임 총리가 자신의 재임기간이 끝나면서 이집트 석유장관을 소개해줬다. 이집트는 산유국이며 석유장관은 한국의 산업자원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가장 강력한 정부기관일 수밖에 없다. 이 인연으로 나는 석유부 산하의 OSG연수원에 강의를 나가게 되었다. OSG연수원은 이집트의 최고의 엘리트 집단을 육성하는 정부산하 교육기관이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이집트였기 때문에 교직에 대한 급여가 후한 편은 아니지만 나는 이 기회를 마음껏 활용했다. 이집트 내의 주류대학의 교수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이집트의 차세대 인재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이집트는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사회이다. 공과대학을 입학하려면 한국의 수능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합격을 위해서는 상위 5퍼센트의 성적을 받아야만 한다. 성적뿐이 아니라 이집트의 공과대학은 유일하게 5년제 학제를 마쳐야만 한다. 한국에서의 의대와 같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과대학 졸업생들은 엔지니어스 신디게이트라는 전국기술자연맹의 정회원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또 다시 시험을 봐야한다. 공과대학 졸업생들도 70퍼센트만이 시험을 통과한다고 한다. 이 회원들 중 많은 사람들이 OSG연수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한국인으로서 강의를 하는 내게는 커다란 자부심과 자긍심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많은 강의를 하면서 일관되게 이집트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영 제네레이션에 대해 이야기 했으며 이집트에게는 놀라운 희망이 있음을 말했다, 어떤 분석가들은 세상에서 마지막에 남을 시장은 아프리카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 의견에 깊이 동의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집트는 놀라운 인구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처럼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집트는 종교적인 나라이다, 이집트에서 낙태는 불법이며 신의 화를 부를 일이다. 태어나는 아이들은 우주를 떠도는 영혼이며, 신이 점지하고 평생 살아갈 모든 것을 제공하여 세상에 나게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산아 제한을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는 나라이다. 한 남자가 5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나라가 이집트이다. 많은 종교적 이유와 민주적, 사회적 이유로 이슬람과 그 국가들의 발전에 장애가 있겠지만 이집트는 성장할 것이다.

시장의 논리는 자명하다. 시장은 소비를 하는 인구가 중요하다. 소비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며 아프리카는 그런 의미에서 엄청난 시장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는 시장이다. 이집트는 아프리카 중동의 관문이며 성지 같은 곳이다.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것은 새롭고 광활한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다. 주저하거나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다. 이집트는 여전히 기회의 땅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최근 나는 이집트에서 금형공장을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집트는 금형을 100퍼센트 수입하고 있다. 현지에서 금형공장은 낙관적인 모델은 아니다. 중국의 금형공장에 물건들이 워낙 싸게 들어오기 때문에 경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나는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현지에 금형공장을 세워 품질과 금형수준을 올린다면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같은 금형공장 건설에는 이집트 정부도 관심이 크다.

물론 이집트에서 비즈니스는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집트에서의 비즈니스는 계약과 약속에 불확실성이 따른다. 계약서 내용에 대한 신뢰가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유인지 이집트의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언제나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도 사업 초기에 무척 당황스럽고 난감한 지경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대처하기가 쉽지 않은 이집트 현지인의 성격이자 그들의 정서다.

나는 한국의 유도그룹과도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유도그룹 회장님이 사장님과 함께 카이로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당시 4박5일 동안 일정을 같이 하면서, 나에게 유도그룹의 이집트 법인장을 맡기고자 한 일이 있었다. 유도그룹은 아프리카 진출에 있어서 이집트를 교두보로 삼고자 하였고, 나는 이 일을 맡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유도그룹은 2018년까지 이집트 내에 설비투자를 아끼지 않을 예정이다. 현지에서 판매 및 서비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여야 한다면, 이런 것들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이집트의 많은 한인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공간으로 제공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다.

나의 세대는 한국에서뿐만이 아니라, 해외 어느 나라에서든 자식들에게 아낌없는 부모가 되려고 했다고 생각된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어느덧 경제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대한민국 차세대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지원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시작했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고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차세대가 모국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자녀 세대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라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자식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어. 하지만 그들이 이제 다 성장하고 나면, 이들의 머릿속에 한국에 대한 이해나 한국인에 대한 자긍심이 있을까?” 이런 고민은 해외에서 살고 있는 모든 1세대 한인들의 실체적 고민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미국에 살고 있다. 어쩌다 한 번씩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의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자녀를 둔 해외 교민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이같은 차세대 아이들에게 한국인의 정신과 정체성을 심어주고 그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 고민은 내가 이집트에서 한인회장을 맡으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가 됐다.

또 하나는 재외국민 보호법이다.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지역은 2011년 쟈스민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화약고로 바뀌었다. 이와 더불어 교민사회도 눈에 보이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적 불안정은 해외 교민사회에는 무엇보다 큰 걱정거리다. 하지만 불안하다고 해서 마음대로 그 나라를 떠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렵게 일구어 놓은 생업을 포기하고 떠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 점에서 해외한인사회의 안전을 위한 우리 정부의 정책이 절실하다. 긴급한 위난의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 중동은 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갈등으로 반목을 겪고 있다. 갑작스럽게 국가적 재난이 일어날 확률이 어디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우리 교민사회는 이민자라기 보다는 한국에 기반을 갖고 있으며, 일시적 외국 거주자다. 영주권과 시민권을 가진 교민은 거의 없다. 이들 재외국민을 일시적 외국체류 국민으로 간주하고 국가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행히 해외 한인사회의 염원을 담아, 긴급 재난에 대비한 ‘재외국민 보호법’ 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다. 여야가 합의해 법안을 제안했으며 많은 의원들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아직 국회에서 통과를 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루 빨리 국회를 통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 잠베지 강위에서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