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최익현의 순국지 대마도에서
[전대열時論] 최익현의 순국지 대마도에서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5.09.0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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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소유국이 한국이냐 일본이냐 하는 문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네 땅이라고 앙탈을 부리고 있다. 이에 맞서 한국에서도 대마도는 원래 한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운동이 활발하다.

옛날 같으면 전쟁을 통해서 해결했을 테지만 현대에 들어오면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이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는 극히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도 무력을 통해서 영토를 획득하는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양성하고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많은 비용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독도와 대마도 문제도 그런 의미에서 한일 양국 간에는 언제든지 맞붙어 싸울 수 있는 개연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우리 경찰은 독도를 수호하기 위해서 경비대를 상주시키고 있다.

그에 비해서 대마도는 약 3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의 관광객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평화로운 섬이다. 5백여 년 전에 세종대왕이 장군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정벌했던 사실은 역사로 남아 있지만 한국정부는 대마도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르며 하도 억지를 쓰는 통에 한국 시민단체들도 이에 대응하여 대마도를 한국 땅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부산에서 5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일본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에서는 137km다. 시차도 없다. 맑은 날이면 부산과 대마도에서 서로 보이는 곳이다.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대마도를 우리가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대마도는 구한말 애국지사였던 면암 최익현선생(1833~1906)이 을사늑약과 을미사변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 감옥에 갇혔다. 그는 일본군이 제공하는 일체의 식사를 거부하고 19일간 단식 끝에 운명했다. 그의 시신은 이즈하라에 있는 수선사(修善寺)라는 절에 안치되었다.

이 절은 백제시절의 비구니였던 법묘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일주문 앞에 걸린 현판은 구한말 판서를 지낸 김학필의 글씨라고 한다. 수선사 경내에는 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라고 웅장하게 쓴 비가 서있어 이곳이 면암의 시신이 모셔져 있던 곳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우리 일행은 4.19혁명공로자회 이기택 회장을 비롯하여 신광성 이춘근 박홍률 박영식 위해룡 김유진 전대열 등이 참여했다. 부산을 출발하기에 앞서 8월29일 한일강제합방 105주년을 맞이하여 부산 금강공원에 세워진 일제만행희생자위령비 앞에서 한풀선사의 진혼무와 이기택 오영숙의 추념사 등 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건너 왔다.

한민족역사현창회를 이끌어가는 황백현 백신종 김병구 이왕식 지만호 장정환등이 궂은일을 도맡았으며 박계동 내외까지 동참했다. 멀리 전주에서 안도현시인도 불원천리 합류했다.

각계각층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자리를 함께 한 것은 대마도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최익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는 데 있었다. 최익현은 원래 포천출신으로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강직성은 당대제일로 임금에게도 직언을 아끼지 않다가 3년이나 제주로 유배되기도 했다. 때마침 일본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빼앗자 그는 전북 태인 종석산(鍾石山)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제자 임병찬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한다.

최익현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흔연히 수많은 유생들과 백성들이 이들의 의병에 대거 합류하게 된다. 지금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 丙午倡義 紀蹟碑가 서있는데 최익현 임병찬의 의병대를 의미한다.

무성서원은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최익현이 가장 기리는 곳이었다.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대는 전북 일대 일본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10년 전 전봉준장군이 동학혁명을 일으켰다가 몰살을 당했던 고부가 바로 옆 동네여서 그동안 일본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던 백성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1906년 최익현이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단식 끝에 사망하자 전국에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열흘 만에 아들이 대마도에 가서 시신을 부산으로 모셔왔으며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까지 기차로 운구하는 데 흰 상복을 입은 백성들이 철로 양변에 도열하여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수백리에 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충남 청양에 모덕사(慕德祠)라는 이름의 최익현사당이 있다. 매년 4월13일에는 항일의거를 추모하는 추모제를 거행하며 가을에는 따로 제향을 올린다. 모덕사에는 면암의 유품을 전시하는 대의관, 서책과 서간을 비치한 춘추관 그리고 추모제를 지내는 성충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모덕사 사당은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정부에서는 최익현의 항일구국 의병투쟁의 공로를 크게 기리기 위해서 그에게 건국훈장 일등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74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과감하게 의병을 일으킨 위대한 선비정신을 높이 현창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애국심을 일깨워 후세를 가르치는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노블레스 오빌리주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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