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⑦] 김종익 회장 "IMF때 남아공서 노점상을 해보기도"
나의 해외개척기⑦] 김종익 회장 "IMF때 남아공서 노점상을 해보기도"
  • 김종익 전 남아공한인회장
  • 승인 2015.09.1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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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의지가 돼준 아내에 감사..."기회는 언젠가 찾아온다"
▲ 김종익 회장과 부인

오랜 외국생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최근에 전립선이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다. 우리 나이에는 다 그렇다고 이해하고 있지만, 건강이 최고의 재산이라는 믿음 때문에 더욱 더 조심스럽게 생활하고 있다. 토마토를 권하는 의사의 권유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갚아야 할 많은 빚을 진다. 남아프리카로 찾아온 그 무렵, 기댈 언덕이 없었다. 아내는 내가 진 인생의 빚의 8할이었다. 건강을 유독 챙기려고 하는 것은 그 빚을 갚는 작은 노력이다.

1997년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선택했다. 사업 때문만은 아니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남아공에 정착하게 되리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사연 많은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남아공에 살게 되었을 것이다.

첫 만남부터 압도당했다. 대륙의 웅장함은 지난한 한국에서의 삶의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한국은 아름답지만 작았다. 사업에서도 삶에서도 가져 보지 못했던 거대함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 길이와 높이를 대강하지 못할 만큼 크다는 것은 황홀한 유혹이었다. 지평선을 마주하는 해발 1800미터의 고지대에서도 숨이 가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아프리카의 최남단의 새로운 나라에서 남은 인생의 시작을 맞이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대략 6천에서 7천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한인 이주 역사가 고작 20여년이고, 이제 한인 1세대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의 사업과 무관하게 우리 한국인의 주류 사업은 가발 사업이다. 물론, 나처럼 자동차와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초기 한인 이주민들은 사진관을 많이 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5천 달러에 불과한 나라의 가난한 흑인들이 카메라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일이 드물다. 촬영하고 기록하고 남기는 일이 서툴렀던 사람들은 자주 사진관을 찾았다.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현상하는 일은 우리 한인들에게는 제법 든든한 수입원이었다. 많은 비용으로 창업하지 않아도 되고, 현지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사진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핸드폰의 보급으로 사진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발 빠르게 한인들의 생업도 변화하였다. 상당수의 한인들이 이제는 가발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에 올 때마다 새 옷을 산다. 특별히 입을 옷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이는 먹지만 그래도 촌스럽게 보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발은 우리의 옷과 같다. 그들에게 가발은 일종의 패션의 중심이며, 옷보다 중요한 유행이다. 긴 머리가 되기도 하고, 금발이 될 수 도 있다. 가발을 직접 염색도 한다. 200개가 넘는 가발을 갖고 있는 흑인 여성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의 가발 사업은 오랫동안 산업의 중심이 될 것이다. 당분간, 우리 한인들의 아프리카 이주도 가발 산업과 함께 계속 될 것이다. 산업화를 향해 가는 모든 국가들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성장하고 있다. 금광의 골드 러쉬를 꿈꾸던 사람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던 참담한 역사를 이겨내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습하지 않아서 청량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내 사업의 새로운 돌파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것을 신뢰하게 된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20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여곡절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소설 한 권을 쓸 만한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으면 즐기라”는 여유를 준 것은 분명 아내였다. 삶의 분명한 비전도 없고, 말조차 통하지 않은 외국에서 끊임없이 용기를 준 사람이었다. 1997년 당시 나는 서울에서 자동차용품을 만들고 납품하는 회사를 하고 있었다. 회사의 임원이며, 투자자로서 치솟는 인건비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다. 자동차 시트카바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일은 손을 많이 타는 일이다. 인건비의 부담은 회사의 경영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많은 한국 제조업 종사자들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중국 등의 현지 공장을 세워서 나가는 일은 회사의 사활을 거는 일이었다.

우리 회사도 준비해야만 했다. 초기에는 필리핀과 중국 등지를 조사해 보았다. 포화상태였다. 만만한 곳은 동남아시아, 중국 어디에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해외에서의 이런 저런 조사를 하는 중에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에서 열리는 싸이텍스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멀리 까지 온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우리 회사 제품 전시회는 뜻밖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얼마 후,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날아왔다. 명분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 지사장 발령이었다. 자신감은 충만했고, 희망은 가득했다. 정돈된 도로와 높지 않으면서 안락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택을 둘러싼 나무와 숲들, 집집마다 들어선 깔끔한 수영장들은 유럽보다 더 좋은 환경이었다. 부자가 아니어도 몇 개의 방들과 2층집으로 꾸며진 저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멀리선 온 손님에게 넉넉한 여유로움을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 과하지 않은 인구, 복잡하지 않은 삶의 형태는 서울에서의 숨 막히는 생활을 벗어날 수 있었다.

17시간의 비행과, 몇 시간의 기타 시간들을 포함하여 꼬박 하루를 여행하여 찾아 온 곳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그렇게 제 2의 고향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IMF가 한국을 강타했다. 우리 회사는 치명적이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나는 발만 동동 거리고 있었다. 한국의 본사는 부도를 맞았다. 채무와 채권, 각 종 송사들의 소식들을 들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회사의 투자한 자금은 회수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부품들과 함께 먼 아프리카에 홀로 버려진 것이다. 급전들이 필요했다. 급하게 친구에게 한국의 아파트를 싼값에 전세를 놓고 현금을 구했다.

울 수는 없었다. 이 남반구의 땅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 자존심은 없다. 살아남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었다. 남아공 현지 지사에 남아있는 부품들을 들고 남아프리카의 프리마켓을 전전하며 노점상으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프리마켓은 한국의 벼룩시장과 비슷하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이 나라에서 프리마켓은 곳곳에 흩어져 있다. 저가의 생활용품들을 직접 살 수 있는 곳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거리로 나서는 일은 자존심과 별개로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와 환경이 모두가 고통스럽다. 이 시절에 나는 한가지만을 생각해야 했다. “기회는 언젠가 찾아온다.”

곧 그렇게 기회가 찾아왔다. 나의 아프리카 삶에서 김진의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한인회장님의 은혜는 지금껏 가슴에 품고 있다. 아프리카의 여러 프리마켓 시장을 전전하며 생활하고 있었던 나에게 김회장님은 싼 가격의 작은 가게를 얻도록 주선해주셨다. 회장님의 권유로 그 가게를 얻은 이후 10년이란 세월을 그곳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보따리 장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한인 사회와도 인연을 거의 맺지 10여년을 살았다. 살아가는 일이 전쟁이었기 때문에 주변을 돌아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내게 작지만 소중한 첫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나는 10년을 그 자리, 같은 가게에서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월요일에 장사를 쉰다. 나는 월요일은 물건을 구매하러 다녀야 했다. 아내와 내가 함께 일했던 그 시절은 내생에 가장 의미 있는 날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절망하기도 했고, 매일 희망을 갖기도 하였다. 아내는 그 세월을 불평 한 마디 없었다. 나와 함께 가게를 보며 나의 의지와 희망이 되어 주었다.

해외에 사는 많은 한인들이 신앙생활을 한다. 대부분은 교회를 다닌다. 의지도 되고 한국말도 들으며 고향에 대한 향수도 달랜다. 나는 종교가 불교이다 보니 교회를 자주 나가지 않는다. 10년간의 한인사회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 때의 나의 신앙은 어쩌면 아내였을 것이다. 함께 늙어가면서 의지하고 자식들을 잘 건사해낸 아내에게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들은 남아공에서 학교를 졸업했다. 첫 직장을 한국에서 현지로 진출한 대한전선에 근무했다. 큰 말썽 없이 성장하고 자라나준 아이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나는 아직도 영어가 서툴고 힘들다. 언어는 한 나라의 중심문화이고 외국인이 그 나라의 언어에 서툴면 사업은 험난한 일이다. 우리가게를 자주 오는 손님 중에 ‘샤미’라는 물건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자동차부품업계에서는 제법 잔뼈가 굵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물어 알아본 ‘샤미’의 정체는 자동차를 닦는 걸레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업이 장사가 되면 작은 일에도 정신을 차려야 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자식들이 영어에 능하다는 사실만으로 나의 일을 돕도록 했다. 요즘은 우리 아이들이, 든든한 나의 버팀목이고 기둥이다.

공식적으로 믿을 수 있는 통계된 데이터에 의하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세계에서 자동차 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나라라고 한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공장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에 있다. 벤츠를 비롯하여 비엠더블유, 폭스바겐 등이 생산된다. 인구가 5천만 가량 되는 나라이지만 요하네스버그의 출퇴근시간에는 정체가 있다. 넓은 나라이고 대중교통은 거의 전무한 곳에서 자동차란 필수품이다. 요하네스버그는 낮 시간대에는 거의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다. 혹시나, 회사에서 조퇴를 해야 한다면 택시를 불러야 한다.

이유와 평가가 다양하지만, 남아공의 많은 자동차 사고로 인해 자동차 관련 업종들이 성업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현지인은 물론, 한국인의 남아공 진출에도 자동차 부분이 많은 것이 그 때문일 것이다. 자동차 관련업종은 굉장히 다양한 분야가 있다. 제조에서부터 부품관련, 정비에서 도 색등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공정만큼 분포된 산업분야도 다양하다.

남아공에서 자동차 정비업소 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도장, 도색, 판금 등의 시장은 제법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할 만한 것은 남아공에서 고장난 자동차를 수리하는 데 드는 시간은 굉장히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한번 공장에 입고된 차량의 출고일은 예상이 잘 되지 않을 만큼 더디다. 한국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아프리카에서 새벽잠을 설쳐가며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아마도 한국인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현지인들은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오랜 문화적 유전자인지 모르겠다. 출근해서 일하고, 점심 먹고, 차 마시고 쉬는 시간을 꼬박꼬박 지켜가면서 정시가 되면 퇴근한다. 설령 작업량이 남았다고 해도 잔업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한 돈을 더 벌기위해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지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같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익숙해지지 않는 환경이다. 필요가 없으면 다른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프리카의 삶이다. 배고프면 언제든지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 때문인지 모른다.

배고플 것을 대비해 저장하는 우리나 서양의 시각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비교 대상이 없고, 비교하지 않으려하는 아프리카인들의 문화는 첨단산업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공임산업, 즉 사람이 직접 작업해야만 그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판금이나 도장분야에서는 작업의 효율이 낮다고 말할 수 있다. 더불어 효율적인 시스템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경쟁을 부추기지도 않지만, 또한 사고가 많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언제나 고장 나고 찌그러진 많은 자동차가 차고 넘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효율적 시스템을 강요하여 엄청난 일과 돈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생각하면, 다이아몬드와 금광 등으로 일확천금의 부를 획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에 속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실제로 몇몇 한국인들은 그런 생각에 남아프리공화국을 찾아오기도 한다. 20년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다. 자원과 관련된 많은 사업들을 운운하는 것과, 갑자기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은 거의 그 끝이 좋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일확천금은 그야 말로 꿈만 같은 일이다. 아프리카는 그 대륙의 크기만큼 너그럽고 관대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삶의 방식은 그것을 순응하고 따르는데서 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도 일단 아프리카에 들어오면 천천히 그들의 문화를 배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한 발씩 다가가면 아프리카는 우리를 품에 안을 것이다.

아프리카를 기회의 땅이라고 말하는 일부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개척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는 개척이 필요한 지역이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가끔씩 질문을 듣는다. 남아공은 위험하다고들 하는데 살기가 괜찮은지 여부를 묻는다. 그들에게 나는 늘 같은 말을 해야 한다. 아프리카는 미국보다 덜 위험하다. 아프리카를 보는 막연한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많은 언론들이 아프리카의 내전과 소말리아의 해적, 이디오피아의 극심한 가난만을 보도한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전체 대륙이 병균과 벌레, 내전과 해적의 소굴처럼 보이는 것은 위험하며 바른 관점도 아닐 것이다. 이런 잘못된 편견은 아프리카의 미래를 가로 막고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는 아시아보다 많은 54개국이 넓은 영토와 저마다 조금씩은 다른 환경과 역사를 갖고 있는 거대한 대륙이다. 또한 많은 개척이 이루어졌고, 이제 미래와 발전을 향해 준비하고 있는 세계 속의 보고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접근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제는 개척이 아니라, 정확한 분석을 통해서 적재적소에 투자하고 접근해야 한다.

그렇게 아프리카는 여유가 있는 삶을 제공할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 앉아서 고급스러운 업무를 하는 것을 꿈으로 삼는다면 아프리카는 영원한 미지의 세상이 될 수 있지만, 용기와 신념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아프리카로 오라고 하고 싶다.

대부분의 아프리카로 온 외국인인들이 나름 많은 사연들로 아프리카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매스컴에 편향적 보도가 심각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 남아공만의 문제는 아니다. 매년 옥타에서 모집하는 인턴제를 아프리카 한인기업들이 많이 신청하지만 지난해 같은 경우 인턴쉽을 신청한 한국청년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은 조금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다.

또 우리 한인회를 통해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아프리카로 진출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구석이 있다. 각자의 생계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넉넉함이 아직은 충분하지 못하고, 짧은 한인회의 업력으로 현지의 네트워크를 많이 구성해놓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세계한인경제인연합회 등을 통해서 아프리카 진출의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여전히 노크하는 인구는 많지 않다. 부족한 대중교통, 심야 문화가 없기 때문에 만족을 할 수 없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분명히 한국의 젊은이들을 유혹하기 힘들 수도 있다. 아프리카는 젊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싱싱한 미래를 보여줄 것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도전할 가치가 충분하다고다고 말 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거대한 대지를 품은 국가지만 요하네스버그와 더반, 케이프타운 등 몇 개의 도시에만 한국인이 살고 있다. 대부분 요하네스버그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케이프타운에 사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유학생과 선교사들이다. 최근에 이 곳으로 오는 많은 젊은이들은 유학생이다. 남아공은 영어권의 국가이고 세계적으로 우수한 교육기관이 제법 있어서 한국의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다.

특히 남아공에 오는 세계의 많은 유학생들이 골프를 공부하기 위해서 남아공에 발을 들인다. 남아공이 세계적인 골프강국인 것은 모두가 안다. 한국이 양궁의 중심이듯 남아공은 골프의 성지와 같은 국가이기도 하다. 어니엘스, 닉 프라이스, 리티브 구슨, 로리 사바티니, 같은 세계적인 선수들이 태어난 곳이다. 대부분 집에서 10분 거리에 골프장이 있다. 골프비용이 엄청나게 싸다는 강점이 있어서 골프 유학생들이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포츠시설은 세금이 없기 때문에 저렴한 비용으로 스포츠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세계 곳곳에서 스포츠유학을 오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공부했지만, 남아공의 교육시설에 아이들을 보내 것에 만족한다. 한국인을 부모로 둔 자녀에게,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잊지 않도록 깨우쳐만 준다면, 남아공에서 교육을 받아보도록 하는 것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을 주변 지인들에게 말하곤 한다.

상당히 많은 아시아인들이 남아공에 정착하고 있다. 중국이 2세, 3세 세대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자신들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고 있으면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시안들이 많아지면서 여전히 떠오르는 인종차별과 관련된 의문도 많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직도 많은 나라에 존재하는 수준의 것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흑인과 백인, 유색인종들이 공존하는 모든 국가에서 일어나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인종차별의 정서, 그 외 미국이나 호주,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존재하는 갈등 정도이다.

심리적으로 불쾌하고 불편할 때도 가끔은 있다. 불이익을 받아야 할 때도 생기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삶의 질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전히 백인이 많은 우월권을 행사하고 있고, 백인 사회가 부유한 삶을 대체로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난한 백인이 없는 것이 아니고, 부유한 흑인 또한 존재한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로막는 수준에 이르지 않음을 곧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는 여전히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기회의 땅이며 도전해볼만한 가치를 품은 땅이라는 것이다.

남아공에서 월드컵이 열렸었다. 세계 속으로 남아공이 나아가려는 노력은 의미 있는 진보라고 생각된다. 월드컵 당시에 한국전을 보기위해 수백 명의 한국인이 포트엘리자베스를 향해 달려갔었다. 우리는 버스를 빌려 타고 무박 3일이라는 놀라운 일정을 감행했다. 한국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요하네스버그에서 포트엘리자베스가지는 무려 20시간을 버스로 달려가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남아공 한인들은 흥분과 기대 속에서 한국과 우루과이의 시합을 관람하기 위해 힘든 여정을 감내했다. 경기가 우루과이의 승리로 끝난 것은 못내 아쉬웠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한인들의 단결은 대륙의 어느 한인사회보다 끈끈하다고 자부한다. 최근에는 대사관과의 사이에도 굉장히 우호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어서 한인사회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축구경기가 있었던 날, 포트엘리자베스의 한 맥도날드 가게는 햄버거 수백 개를 만들어야 했다. 다시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먹어야 하는 남아공 한인회의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외국에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 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특히 우리 1세대 해외 이주민들에게는 연어처럼 감지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DNA가 존재하며, 여전히 언젠가는 고향산천에 뼈를 묻고 싶은 심정으로 해외의 삶을 유지하고 살고 있다.

나는 한국인에게 아프리카는 반드시 한번은 와보기를 권한다. 내가 남아공에 올 무렵에는 한국에서 오는 항공편이 많지 않았다. 아니 전 세계적으로 남아공을 향하는 항공편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에서 홍콩, 방콕, 케냐, 카타르 도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중국 북경 등지에서 요하네스버그로 들어오는 항공편이 많아지면서 한국의 접근성은 훨씬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니라도 아프리카를 통해 배우는 모든 것은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충분히 계기가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남아공은 더욱 기대가 되는 환경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남아공과 보츠와나 등지는 한국의 젊은이에게 좀 더 색다른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될 것이다.

세계사속의 유래 없는 인종차별을 딛고 흑인대통령의 국가를 이끌었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나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남아공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길 것이다. 아프리카를 배우는 일은 미래를 꿈꾸는 일이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조금씩 이겨나가는 것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거르지 않고 토마토를 찾아 먹으려 하는 것은, 반드시 전립선이 불편해서만은 아니다. 남은 삶도 이 곳에서 힘차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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