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⑧] 신동철 회장 "두바이에서 아랍 인도 중국상인과 겨뤄"
[나의 해외개척기⑧] 신동철 회장 "두바이에서 아랍 인도 중국상인과 겨뤄"
  • 신동철 아프리카중동한상연합회장
  • 승인 2015.09.1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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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 에이전트 1호로 독립...의류와 식품 유통업 운영
 

나는 2015년 2월 아프리카·중동한상연합회(아중동한상연) 초대 회장을 맡았다. 아프리카 중동지역 한인회장단 모임인 아프리카·중동한인회총연합회가 2월22일 아프리카 짐바브웨 빅토리아폭포타운의 한 호텔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아프리카 중동지역 한인회와 한인상공인들의 상생발전을 위해 아중동한상연를 공식 출범시켰고, 내가 이 모임의 초대 수장이 된 것이다.

나는 회장 취임 인사말에서 “폭 2.7km, 높이 110m의 거대한 빅토리아폭포도 실개천이 모여서 큰물을 이룬 것”이라면서 “아중동한상연 출범도 하나의 실개천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빅토리아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긴 폭포다. 나는 또 “아랍상인 인도상인 등 세계 5대상인들이 모여 있는 두바이에서 지난 30년간 사업을 해왔다”면서 “그간의 경험을 살려서 모래알이 뭉쳐서 진흙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내가 살고 있는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구성하는 7개 토후국(Emirates) 중의 하나로 아라비아반도 동쪽에 있다. UAE는 아부다비·두바이·샤르자·라스 알 카이마·아즈만·움 알 카이와인·푸자이라 등 7개의 토후국으로 구성돼 있다.

19세기 이래 이 지역을 지배해 오던 영국은 1968년 철군을 발표했다. 이에 카타르와 바레인을 포함한 9개 토후국이 연합 결성에 합의했지만, 그 후 바레인과 카타르가 따로 독립하면서 1971년 12월 2일 라스 알 카미아를 제외한 6개 토후국으로 구성된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로 독립했다. 각각의 토후국은 완전 독자적인 행정조직을 가지고 예산을 집행한다. 대통령은 수도 아부다비에 있고, 두바이의 수장(국왕)이 총리를 맡고 있다. 단, 외교·군사·통화·우편 등은 연방정부 소관이다.

대통령이 의장인 연방최고회의가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이고, 그 결정은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포함한 5인 수장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단 거부권은 아부다비와 두바이만이 가지고 있다. 결국 아부다비와 두바이 양대 군주가 권력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 구단주로 개인 자산만 30조 원을 넘는 셰이크 만수르가 이 나라의 부총리이다.

내 고향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이다. 소백산 밑의 한촌(閑村)으로 백두대간 등산로가 우리 마을을 지나간다. 오전약수탕이 유명하고, 영주 부석사가 인근에 있다.시골에서 제법 공부를 잘해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경기고 72회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본 마지막 세대다. 대부분의 동기처럼 나도 졸업하면서 으레 서울대 시험을 봤지만, 두 번 이나 낙방했다. 답답한 마음에 잠깐 가출도 해봤지만,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어서 부모님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입대해야했기 때문에 후기 대학이라도 들어가야 했다. 그때 친구들이 한국외국어대학으로 많이 진학했고, 나도 그 대학에 지원했다. 원래는 외대 정외과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랍어과 원서를 사오셨다. 당시 중동붐이 한창이어서 그리 하신 걸로 알고 있다. 대학입시에 자꾸 떨어졌으니 죄인 된 심정으로 덤덤히 받아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대흐름을 꿰뚫어 보는 어머니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따름이다.

입학성적은 좋았으나 학교생활은 재미가 없었다. 외무고시를 봐서 외교관이 되고, 유엔 사무총장을 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노느라 외시는 꿈도 못 꿨다.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가 4학년으로 복학했다. 19학점이 펑크 나 졸업하는 데 애를 먹었다.

1981년 졸업하고 주식회사 선경(현재 SK네트웍스)에 입사했다. 종합상사에 들어가서 해외 근무를 할 생각이었다. 직물 수출을 담당하다가 87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 젯다 주재원으로 해외생활을 시작했다. 대리 2년차였다. 젯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제2의 도시로 홍해와 접하는 항구도시다.

동기들보다 일찍 해외생활을 시작한 것은 집안 사정과 관계있다. 1986년 3월에 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빚쟁이들이 빚 받겠다고 내 회사로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그 빚이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때마침 사우디 지사에서도 나를 요청해 도망가는 기분으로 얼른 떠났다. 당시 살고 있던 잠실아파트 전세금을 받아 빚잔치를 했다. 처가에서는 작은 아파트라도 하나 마련해두고 가라고 했으나, 빚을 남겨두고 가기에는 찜찜해서 모두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했다.

1,500달러로 사우디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 사택이 있고, 차는 할부로 구입해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다. 실적이 괜찮아 사우디 생활 5년 만인 1992년 5월 SK 젯다지사 주재원에서 두바이지사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종합상사의 꽃’이라는 해외지점장을 맡은 것이다. 내 나이 35살 때였다. 전임자는 나보다 10살 위였고, 후임자도 나보다 5살 많았다. 운이 좋았고 타이밍이 맞은 셈이다.

두바이는 예전에 진주조개를 잡는 조그만 어촌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일본에서 인조 진주를 대량 생산하면서 진주 조개잡이도 시원찮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석유가 발견되면서 전기가 마련됐다. 중동의 다른 산유국과 달리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금융, 관광 등에 오일달러를 집중 투자해 미국의 라스베이거스 이상의 별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70~80년대 중동붐이 한창일 때도 우리나라에서 두바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할머니들도 두바이를 안다. 영화 ‘미션 임파시블4’에서 톰 크루즈가 세계 최고층 빌딩인 163층의 두바이 버즈 칼리파(Burj Khalifa)를 창밖에서 기어오르는 장면은 가관이다.

나는 젯다지점 시절 직물만 취급했지만, 두바이에 오면서 직물뿐 아니라 철강, 화학제품, 군수물자로 범위를 확대했다. 이쑤시개부터 비행기까지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러 다녔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내 직장생활의 황금기였다.

1994년 말 본사에서 귀임 발령 소식을 들었다. 나로서는 지사 생활이 재미있었자먼, 회사에서는 내가 너무 고생한다고 불러들인다는 것이었다. 입사동기들이 본사에서 차장으로 담당자 역할을 할 때였다. 다시 서울에서 ‘쫄따구’ 생활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문뜩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고생하더라도 네 사업을 하라는 평소 말씀이었다.

1995년 3월 회사를 과감히 퇴직하고 두바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현지에 Rio trading LLC를 차렸다. 직물 에이전트였다. 직물이라고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폴리에스터, 즉 화학섬유다. 직물사업은 일본의 오사카에서 번성해 내가 한참 일할 때 우리나라 대구로 주도권이 넘어왔다. 물론 지금은 중국 저장성 샤오싱(紹興)이 중심지가 되었지만, 당시 두바이는 아라비아반도의 직물 허브였다. 거래량이 15억 달러(약 1조5천억 원)에 달했고, 인도 에이전트들이 시장의 100%를 장악하고 있었다. 한국산 직물도 한국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할 때였다. 말하자면 내가 한국인 직물 에이전트 1호였던 셈이다. 인도 상권에 도전한 것이다. 뭐 두려울 게 어디 있나? 뉴욕에서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청과물 시장을 한국인이 뺏은 것처럼 두바이 직물시장도 우리가 뺏어오면 되는 것 아닌가?

종합상사 입사 때 선배들이 하던 말이 있다. 전 세계에 5대 상인이 있는데, 첫째가 유대상인이고, 그 뒤로 중국상인, 인도상인, 이란(페르시아)상인, 아랍상인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문제로 유대상인을 제외한 4대 상인들이 두바이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 4대 상인들은 각각 특징이 있다. 인도상인은 머리가 좋아 언어와 계산이 빠른 반면에 게으른 게 흠이다. 아랍상인들은 감각이 탁월해 돈의 흐름을 꿰뚫는데 귀신이다. 중국상인과 이란상인은 스케일이 크고 말을 현란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대신 뻥이 세고, 약속을 잘 안 지킨다.

내가 이 거인들 틈에 낀 것인데, 한국인들은 능력 면에서 이들에게 분명 뒤진다. 기분에 좌우되고, 성격이 급하다. 협상은 기다림의 싸움이기 때문에 조급하게 굴면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이 선전하는 것은 근면 성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중력이 좋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끈기가 있다.

우리는 이 두바이 시장에서 급속히 인도상권을 잠식해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매출액이 1억 달러에 달했다. 원래 내 성격은 물러 터져 놀기 좋아했지만, 이건 내 사업이었다.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어떤 한국인이 도전하겠는가?

나는 하루 15시간 일했다. 인도상인들이 하루 2시간 일할 때 나는 하루에 세 번 출근했다. 첫 달부터 흑자를 냈다. 서울 충무로에서 신동철이 대박 났다고 소문이 나 후배들이 두바이로 몰려오기도 했다. 실제로 몇몇 후배는 내 가게에서 2년 정도 일하고 따로 가게를 차려 나갔다. 그러다 2005년 이후 한국산 직물이 중국산에 밀리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직물거래는 중간 알선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내가 밑천이 있어야 큰 거래를 만들 수 있다. 인도상인들이 하루 2시간 일해도 큰돈을 버는 것은 자본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중간 알선보다 내가 직접 수입상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입을 하려면 이 나라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했다. 수많은 아이템을 검토하다가 인테리어 원단수입으로 정했다. 실내 커튼지 같은 것으로, 1년에 200만 달러만 팔아도 30만 달러가 남았다.

장사가 되니까 겁도 없이 2002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인테리어 원단․담요 판매회사를 차렸다. 인도상인들이 러시아에서 돈 버는 걸 보고 따라한 것이다. 열심히 했지만, 5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인건비와 임대료가 3배 이상 뛴 데다 마피아에게 세금 바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2005년에는 두바이에서 ‘Wonu International'이라는 담요공장을 설립하고 담요를 생산하기도 했다. 사우디 업체와 합작한 것으로 2012년 화재로 전소했다. 1년 반 뒤에 재가동해 지금도 담요 등을 생산한다.

현재 내 사업 포트폴리오의 첫째 항목은 의류무역이다. 중국 칭따오에서 만든 담요와 의류를 아랍에미리트 거래처에 넘기는 일이다. 금액으로는 한 해 3천만 달러쯤 된다. 두 번째는 2008년 7월에 시작한 ‘1004마트’다. 식품유통업이다.

2007년 말 두바이 경제가 피크에 달했다. 세계 각지의 돈이 두바이로 몰려왔다. 한국인들도 너도 나도 두바이로 달려왔다. 그런데 한국 식품가게는 한아름상회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구시가지(올드 두바이)에 있어 신시가지(뉴 두바이) 거주자들은 장 보러 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가려면 예전에는 차로 30분이면 됐다. 그런데 2007년 무렵에는 차로 2시간 걸렸다. 경기도 분당 사람이 상계동 가서 장 보는 격이었다. 요금소(톨게이트)를 만들어 차량 통행을 제한했지만 교통 혼잡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식품을 잘 몰랐다. 그런데도 식품업체를 차리면 돈이 될 것 같았다. 단,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앞지르려면 가격이 싸거나, 친절하거나, 물건이 다양하거나, 위치가 좋거나 등 장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원래 아랍에미리트 현지인을 상대로 식품장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됐다. 그 정도로 사업을 하려면 투자금이 엄청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교민들만이라도 확실하게 잡고 싶었다. UAE 교민이 1만3천명이니 그 사람들만 잘 잡아도 밑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우리 가게 손님의 70%는 한국사람이고, 일본사람과 중국사람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식품가게 ‘1004마트’를 차린 직후 두바이에도 세계금융위기가 찾아왔다. 다행이라면 식품은 경기를 덜 타고, 또 원전 공사로 한국인들이 많이 몰려와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004마트의 연매출은 1천만 달러 정도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우리 가게 물건이 나간다. 커피믹스, 라면, 김치, 쌀 등 한국의 이마트에 있는 물건은 모두 취급한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 한 달에 컨테이너 10개 이상이 들어와 500평 창고를 가득 채운다. 나는 이 규모를 10배 이상으로 키우려는 꿈을 꾸고 있다.

두바이의 가장 큰 마트는 까르푸다. 매장 내에 4만개 품목이 있지만, 한국식품은 농심 신라면과 오리온 초코파이뿐이다. 나는 이 까르푸를 뚫어볼 생각이다. 두 개밖에 안 들어갔으니 여지가 많다고 본다. 그런데 무슨 아이템으로 들어갈까? 이 사람들에게 고추장을 먹이겠나, 김을 먹이겠나? 내가 유망하게 보는 품목은 김치, 만두, 두부 등의 건강식품과 과자류다. 일본의 기코만 간장이 미국 시장을 뚫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스시(초밥)를 먼저 보급하고 이어 간장을 내놨다는 것이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중동 방문 후 이슬람 할랄푸드를 말씀하다. 큰 그림은 맞지만 그걸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두바이 시장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전 세계의 최고 전문가들이 각축을 벌이는 곳에서 쉽게 돈 벌려고 하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무역경험, 언어구사, 제품경쟁력, 자금 등 무엇이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나는 종합상사에서 제대로 일을 배웠고, 해외 주재원 생활을 통해 이 나라 시장에 차근차근 접근했다.

아랍에미리트는 세계 4위의 원유매장량과 세계 3위의 가스 매장량을 바탕으로 원유 등 관련 부문의 생산과 수출이 경제의 절반을 차지한다. 아랍에미리트 전체 1일 원유 생산량은 300만 배럴 정도 되지만, 대부분은 아부다비에서 나고 두바이는 1일 15만 배럴에 지나지 않는다. 두바이가 원유 생산 대신 중동의 금융, 관광 허브로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두바이가 세계적인 무역기지가 된 것은 지리적인 이점도 있다. 전 세계 어디서든 5,6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걸프전 이전까지 중동무역의 중심지는 예멘이었다. 그런데 예멘이 걸프전에서 이라크를 지지하는 바람에 ‘왕따’를 당하고, 대신 두바이가 걸프전에 필요한 물품의 물류허브이자, 휴양지로 떠오른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동시 다발적인 테러가 발생했다.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은 번영의 상징이며, 각각 미국의 정치와 경제의 중추인 워싱턴과 뉴욕이었다. 워싱턴에서는 미국 국방부가, 뉴욕에서는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로 공격을 당한 사건이다. 미국 재산이 불안해지면서, 미국에 예치해두었던 아랍의 돈이 두바이로 몰렸다. 당시 두바이가 개방폭을 확대해 외국인이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한 투자유치정책도 주효했다. 돈뿐만 아니라, 9·11테러 후 보복이 두려워 미국으로의 유학을 주저하는 아랍 지역의 부유층 자제들이 두바이의 대학교로 입학한 것도 두바이가 세계의 허브가 되는데 일조했다는 평가이다. 두바이 정부 역시 교육자유지역을 설정하여 세계적인 대학 교수를 유치하고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며 학교의 질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2011년 시작된 ‘아랍의 봄’도 두바이 경제에는 보약이 됐다고 한다. 2010년 1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자스민 혁명’이 일어났다. 23년간 독재를 해오던 튀니지의 벤 알리(Zine El-Abidine Ben Ali)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로 시작된 민주화 혁명으로,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이름을 따 서방 언론이 붙인 명칭이다. 결국 벤 알리 당시 튀니지 대통령은 2011년 1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튀니지혁명은 아프리카 및 아랍권에서 쿠데타가 아닌 민중봉기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첫 사례가 되었다. 또한 인근 이집트를 비롯해 알제리ㆍ예멘ㆍ요르단ㆍ시리아ㆍ이라크ㆍ쿠웨이트 등 독재정권에 시달리던 국가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랍의 봄’ 때 아랍의 부호들이 두바이로 도피했다는 점이다. 몸만 온 것이 아니라 돈도 같이 들고 온 것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한때 휘청하던 두바이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두바이에는 3S가 있다고 한다. 바다(sea)가 좋고, 사막(sand)이 볼 만하고, 쇼핑(shopping)천국이라는 말이다. 바다는 그렇다 치고, 사막관광은 발상이 기막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무더운 곳에 ‘사막 사파리(desert safari)’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TV의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도 소개된 바 있지만, 울퉁불퉁한 사막에 타이어 바람을 살짝 뺀 사륜구동 지프에 관광객을 태우고 청룡열차처럼 한 바퀴 굴리는 프로그램이다. 또 사막 한 가운데에 차린 캠프에서 아랍음식을 먹고 벨리 댄스를 구경하는 게 얼마나 멋진가?

두바이도 겨울이 있다. 11월부터 2월까지로 기온이 15도에서 25도 사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쌀쌀하다고 하지만, 우리한테는 가장 좋은 날씨다. 반면에 여름은 50도 가까이 돼 무지무지하게 덥다. 물론 한국인들은 한여름에도 골프 치러 가지만.

선진국은 시스템대로 움직이니까 새로운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중동지역은 아직 세팅 단계여서 기회가 있다. 또 아랍인들은 의외로 한국인과 정서적으로 잘 맞는다. 정이 많고,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있다. 손님대접도 깍듯하다. 70~80년대 한국의 근로자들이 고생한 것을 기억하고 있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다.
인도나 네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손을 모으고 ‘나마스떼’라고 인사한다. ‘당신이 경배하는 신을 존경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슬람 사람들은 ‘샬람’이라고 인사한다.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는 뜻이다. 남의 종교를 존중하고, 나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성당이나 교회에 다녀도 아무 문제없다. 술도 먹고 밤 문화도 있는 곳이다. 대신 종교가 없으면 동물 취급을 한다.

나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두바이 한인회장을 맡았다. 교민들이 직접 만나기가 힘들어서 온라인 사이트를 활성화했다.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보고 배울 만큼 교민들이 폭발적으로 호응했다. 연말 송년모임은 골프장을 빌려 초대 교민을 4백 명에서 1천5백 명으로 늘렸다. 이홍렬, 신효범 같은 연예인들을 초대해 신명나는 파티를 열었다.

교민들 중에는 80대도 계신다. 베트남 패망 후 이란을 거쳐 두바이로 오신 분이다. 이들 1세대 중에는 가구공장으로 자리 잡은 사람도 있다. 다만 80년대 말까지는 한국식품이 많지 않아 고생했다고 한다.

두바이는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다. 중동국가 중에서는 가장 자유롭고 잘 사는 나라다. 서비스 물가는 비싼 편이나, 공산품 가격은 한국 수준이다. 교육환경은 수준급이어서 여자들이 더 있고 싶어 한다. 나도 아들 둘을 이곳 영국계 중고등학교에서 공부시켰다. 67개국 친구들과 같이 공부해, 아이들이 세계 어디를 가도 겁이 없다.

아랍에미리트의 인구는 1990년에 182만 명이었다. 2010년에는 824만 명으로 늘어났고, 2015년에는 약 1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5년 사이에 인구가 5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주택과 도로, 자동차는 모두 커졌는데, 교육과 의료는 부족하다. 앞서 말한 대로 두바이의 교육시스템은 영국식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대신에 의료 분야는 우리나라가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두바이에 한국 치과를 오픈하려고 뛰어다녔다. 분명히 우리보다 치료 수준이 낮은데도 의료수가는 우리나라의 2배다. 그나마 치과의사도 부족하다. 한국의 치과의사 50명을 만나 의사를 타진했으나 잘 안됐다. 분명히 한국은 의사가 넘치는데, 아직 외국으로 가기에는 걸리는 게 많은 모양이다. 이 사업은 현재 보류중이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다. 두바이에서 치과를 하겠다는 의사가 있으면 같이 일해 볼 생각이다.

일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나는 원래 사업체질이다. 사업은 결국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큰 실수 없이 사업을 잘 키워왔다. 1995년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100만 달러를 벌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놀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을 해보니까 참 재미있었다. 인도나 아랍상인들이 70이 넘어도 사업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6,7년 전에 결심한 것이 있다. 이곳에 뼈를 묻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시작한 게 ‘드림 홈 커튼’이라는 직물사업이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까 새로운 사업이 보인 셈이다. 5년 전 큰아들이 미국에서 대학 공부를 마치고 이곳에 합류했다. 대를 이어 사업을 할 수 있게 돼 여간 기쁘지 않다. 큰아들은 지난 5월에 결혼해 며느리도 우리와 함께 있다.

2020년에는 두바이에서 엑스포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전 세계의 기업과 사람이 또다시 두바이로 몰려들어, 두바이가 또 한 번 대박을 칠 게 분명하다. 우리 회사에는 현재 30대 초중반의 한국인 직원이 5명 일 하고 있는데, 인도나 네팔 직원들보다 급료가 2배 이상이다. 집값을 포함해 월 3천불에서 6천불까지 지급한다. 그래도 나는 더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함께 일하기를 기대한다. 젊은이들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두바이에서 새 꿈을 이루기를 바라면서.

나는 지금도 내 인생여정에서 갈림길을 맞이했거나 변화가 있었던 날짜들을 정확히 기억한다. 사우디 젯다 주재원 발령, 두바이지사 지점장 부임, 직물사업 독립선언, 식품유통업 진출 등 굵직한 것 외에 세세한 것까지 합치면 수없이 많다. 앞으로도 나의 ‘인생 일지’는 내 머리 속에 계속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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