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안휘성 허페이의 리훙장 생가... "중국대륙 첫기차는 기관차 아닌 말이 끌고 달려"
[탐방] 안휘성 허페이의 리훙장 생가... "중국대륙 첫기차는 기관차 아닌 말이 끌고 달려"
  • 이종환 기자
  • 승인 2016.01.12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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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의 버팀목...부국양병의 양무운동 주도
▲ 리훙장 생가 입구

‘먼지 일으키며 달리는 한 필의 말에 양귀비 웃네, 누구도 여지라는 과일을 싣고 달리는 것을 모르고 있네(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茹枝來).”

당나라 시인 두목의 ‘화청궁을 지나며(過華淸宮)’에 나오는 귀절이다.

군사용 파발마가 붉은 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지나간다. 천리를 달려 변방의 급보를 도성에 전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실은 그 군마가 양귀비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여지라는 남방과일을 싣고 달리는 줄을.

시인 두목의 담도 어지간히 컸던 모양이다. 당현종과 그의 애비 양귀비를 이렇게 날카롭게 풍자했으니까 말이다.

이 시귀절을 떠올린 것은 중국 안휘성 허페이(合肥)에 있는 리훙장(李鴻章)의 생가를 찾았을 때였다. 리훙장의 생가는 합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화이허(淮河)로 보행가에 있었다. 기자는 안휘성한국인(상)회(회장 공성문) 송년의 밤 행사에 초청받아 갔다가 리훙장 생가를 방문했다.

리훙장(1823-1901)은 청나라의 마지막 버팀목 역할을 인물이다.

사병을 동원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정계 실력자로 등장한 그는 청제국의 몰락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양문물 도입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한 양무운동(洋務運動)도 그가 주도했다.

▲ 리훙장 생가에는 그의 업적과 당시 사진들이 소개돼 있다.

그는 강남제조국, 금릉제조국, 천진기계국 등 대형 근대식 공장들을 설립해, 철강과 기계, 탄약과 무기 제조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천진북양해군학교, 강남육군학교, 여순 및 광저우에 어뢰학교, 상해포병학교 등을 세우는 한편, 북양해군도 창설해 청제국의 무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신국을 만든 것도 리훙장이었다. 그는 북양해군의 자금 일부를 돌려서 천진과 상해를 잇는 전신 선로를 개통시켰다. 이를 통해 수천년간 변방의 군사 급보를 도성에 전달하던 파말마 제도가 폐지되고, 전신이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만든 게 리훙장이었던 것이다.

중국대륙에 처음으로 철로를 놓아 기차를 달리게 한 것도 리훙장이었다.

하지만 중국에 기차를 달리게 하는 등 그의 양무운동은 순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조정 안팎에서 반대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철도를 놓고, 기차를 달리게 했을 때도 엄청난 반대에 부닥쳤다고 한다.

양무운동에 반대한 완고파들은 철도운행을 막기 위해 수많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철로를 만들면 풍수를 해친다, 기차가 달리면 진동이 수백리를 가서 황실의 능에까지 나쁜 영향을 준다, 기차 연기가 농작물을 해친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였다고 한다.

그 결과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철도는 첫 개통식에서 결국 기관차가 아니라 말이 기차를 끌고 가는 해프닝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한국에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반대가 심했다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훨씬 더했던 모양이다.

리훙장의 생가에는 리훙장이 부국강병을 위해 생전에 시도했던 수많은 개혁들이 파노라마로 소개돼 있다. 생가에는 늦은 시간인데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생가 매점에서 파는 ‘리훙장 이야기집’이란 책에는 이런 얘기도 소개돼 있었다.

▲ 안휘성한국인회 송년의 밤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 수렴청정하던 서태후는 이화원을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황실용으로 쓸 이화원 건설을 위해 세금을 걷자니 명분이 서지 않았다. 이때 리훙장이 묘책을 냈다고 한다. 청제국을 지킬 북양해군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걷고, 이중 일부를 전용해 이화원 건설 경비로 사용하자는 안이었다.

그래서 이화원에 가짜 해군훈련소를 만들고, 두척의 배도 들여놓고 서양교관도 불러서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면서 이화원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리훙장은 북양해군 건설을 위해 할 수없이 이 같은 묘책을 썼다고 하지만, 결국 그가 만든 북양해군은 청일전쟁때 조금의 활약도 보여주지 못한 채 일본의 기습공격에 대패하고 만다.

이 패배로 리훙장이 애써 길러냈던 해군 장교들이 대거 수장되거나 자살했고, 결국 대청제국은 빠르게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리훙장이 사망한 것은 1901년. 78세 때였다. 대청제국은 그로부터 정확히 10년후 신해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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