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느 노익장의 죽음
[칼럼] 어느 노익장의 죽음
  • 류현옥 재독칼럼니스트
  • 승인 2016.05.09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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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들어 자유의 몸으로 요가를 시작했다. 몸이 유연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계량된 것으로 바닥에 앉았다 일어났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의자 요가’에 도전했다. 내가 최연소자로 소개가 되자 최연장자인 헤트비히가 자기 뒤에 앉아 따라하라고 했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그녀는 나를 특별히 아끼고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면 선물종이에 예쁘게 싼 초콜릿을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날씨 좋은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가는데 헤트비히가 롤라토(노인들이 밀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유모차)를 밀며 앞에 가고 있었다. 약간 앞으로 구부정했지만 균형 잡힌 자세로 안정을 유지하고 노모차를 밀고 있었다.

“안녕? 해트비히, 어디 가는 중이에요?”
“아이고, 작은 내 친구야? 자넨 어디로 가는데?”
“야시장에 채소 사려요.”
“그래? 난 저기 저 건축물상으로 간다.”
“건축물상점엔 웬일로요, 살 게 있어요? 운반도 힘들 텐데!”
“깡통 페인트를 사서 롤라토에 달린 그물 광주리에 담아오면 돼.”
“페인트는 뭐하려고요?”
“장롱 색깔이 다 지워져 흉해서 칠하려고…”
“그걸 누가 칠해요?”
“당연히 내가 하지! 누가 해?”

그 장롱은 100년이 넘은 그녀의 할머니가 남긴 유산으로 벌써 여러 번 색칠을 했단다. 요가클럽 회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헤트비히는 102세 생일을 3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애착을 갖고 보살피던 세상의 모든 것과 이별했다. 화요일 요가가 시작되기 전, 이 소식이 전해졌다. 회원들은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며 잠시 묵념을 했다. 모두 기독교인들이기에 헤트비히의 영혼을 걷어주신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그녀의 영혼에 평화가 깃들길 바라는 기도였다. 사랑이 넘치고 유리알 같이 맑은 눈빛을 반짝이며 언제나 너그럽게 세상을 보라고 말하던 그녀였다. 몰려오는 난민들로 심기가 불편해 흥분하는 회원에게 “불쌍한 어린것들, 내가 20년만 젊었어도 두 소매 걷어붙이고 도와주려가겠는데…”라고 호통치던 그녀였다.

사람들이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면 “무슨 감기가 또 찾아와서 애를 먹이나? 차를 끓여서 꿀을 타서 마시고 이틀 동안 꼼짝없이 이불 밑에 누워 있어! 나을 게여…”하던 그녀의 말소리가 귀에 아련히 울린다. 102세 생일은 회원들과 함께 하자던 밝은 목소리를 남긴 채 그녀는 사라지고 빈 의자만 남았다. 독거노인인 그녀를 아침 8시마다 이웃사람들이 확인해 주는 일을 계속했는데, 두드려도 문을 열지 않아 구급차를 불렀고, 부엌 창문을 깨고 들어가 화장실에 누워있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회원들은 마음을 졸이며 희소식을 기다렸다. 워낙 야무진 그녀였기에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의 죽음은 모두에게 절망을 안겼다.

뇌졸중으로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고 말이 부자연스러워지자 헤트비히는 그만 살겠다고 결정했다. 실망하는 사라들도 있었지만 오래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신 것을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녀는 지난 30여 년을 요가 클럽에 나온 최고 연장자로, 요가 클럽의 얼굴마담 역할을 해왔다. 가족으로 82세의 딸이 이틀에 한 번씩 와서 방문하는 일이 전부였다. 혼자서 방두칸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

“오래 살아서 세상 변하는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이 먼저가면서 남기고 간 슬픔을 이겨낼 힘이 점점 없어져가니 나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죽음 소식을 들으면 누구나 놀람을 금치 못한다. 그녀의 죽음은 특별히 더했다. 100살이 넘은 노인답지 않게 밝게 큰소리로 웃었고 언제나 즐겁게 요가를 했다. 요가 선생은 제일 앞에 앉던 그녀의 빈자리를 바라볼 수가 없다며 나를 그 자리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나 역시 심기가 불편해 선뜩 가서 앉을 수가 없는 의자였다. 장례식까지는 그 자리를 비워두고 그녀를 의식해 요가를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요가 선생님은 빈자리를 보며 마음이 산란해서 수업에 집중이 안 된다고 했다.

헤트비히의 죽음은 하루도 쉬지 않고 톱뉴스로 보도되는 대도시의 죽음들과는 조금 다른 소식이었다. 고희(70)를 앞둔 나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는데, 헤드비히와의 이별은 그 변화에 한몫 더했다. 육신을 빠져나와 세상과 이별하는 영혼은 이 땅에 잠시 머무르고 갈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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