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 범하 이돈명 선생
인권변호사, 범하 이돈명 선생
  • 김정남(언론인)
  • 승인 2011.01.2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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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도 차거니와 인심도 어나보다/ 격장천리 소식이야 알 듯 말 듯 하다마는/ 밤마다 잠 못 이루는 내 가슴이 아파라.”

이는 1970년대 재야 민주수호운동의 중심이자 인권변호사였던 이병린 선생이 남긴 ‘양심수’라는 제목의 시조다. 그는 때로는 호방하고 때로는 처연한 자신의 심사를 한편의 시조로 읊은 당대의 풍류객이었다. 이 시조에는 담장 하나로 천리나 떨어진 감옥 안의 양심수를 걱정하는 인권변호사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다.

1970년대와 80년대, 그 엄혹했던 정치적 탄압과 인권유린의 시절, 길을 내면서 인권변론을 열어나갔던 이병린 변호사가 인권변론의 대부였다면, 살아 생전에 그의 바톤을 직접 이어받아 인권변론의 한 흐름을 만들고 이끌어왔던 이돈명 변호사는 인권변호사의 맏형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불리워왔다. 두 분이 다같이 그 인권변론과 민주화 투쟁으로 인하여 옥고를 치렀다는 점에서도 유사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권력에 굴하지 않은 인권변호사의 맏형

얼마 전 타계한 이돈명 변호사는 1970년대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가 발생했을 때, 법조계 광고게재운동을 주도하면서 ‘돈도 받고 절도 받는’ 편한 변호사의 길을 버리고 험난한 민주화 투쟁의 길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는 물론,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동서양의 명구, 명언들을 변호사의 연명 하에 돌출광고로 만들어 싣기 시작한 것이다. 몸소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이름을 빌리고 광고비를 거두었다. 이 기발한 착상의 응원이 그 당시 민주회복운동, 그리고 언론자유투쟁에 엄청난 힘과 용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인혁당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김지하의 옥중수기를 문제삼아 유신독재의 광기가 그의 생명을 위협했을 때, 이돈명 변호사는 자청하여 그 사건을 수임함으로써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당시 인혁당 조작사건은 유신정권에게는 아킬레스 건으로, 권력이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던 사건이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유신정권이 그렇게도 금기시하던 인혁당 조작사건을 변론을 통하여 정면으로 문제제기했다. 이돈명 변호사는 독재권력에게 눈에 가시 같은 힘들고 위험한 사건을 맡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같은 사건을 놓고 변론하더라도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은 언제나 ‘나이 많은’ 자신이 맡았다.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리영희 백낙청 필화사건, 오원춘 사건,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 YH사건, 남민전 사건, 동일방직 원풍모방 사건, 학림사건, 오송회 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김근태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크고 작은 사건마다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1980년대 천주교 인권위원회 일을 맡고부터는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사건이 없었다. 갇힌 양심수에게는 변호인이자 든든한 동지요 따뜻한 보호자였고, 그들의 가족에게는 격의없고 자상한 상담역이었다. 그의 변호사 사무실은 이들로 하여 언제나 문전성시에 만원이었다.

1986년, 5.3인천 사태로 쫓기는 이부영을 당신이 숨겨준 것으로 해달라는 나의 부탁 한마디가 끝내 이돈명 변호사로 하여금 범인은닉혐의로 구속되게 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더할 수 없는 죄송스러움이었지만, 한번도 이부영이나 내게 고생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돈명 변호사는 그 법정에서 “법이라는 이름으로 불의에 쫓기는 한마리 양을 보호했을 뿐, 결코 범인을 은닉하고 법을 위반했다는 가책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만큼 그때 그는 한 사람의 변호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범으로 그 누구보다 당당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그의 관심은 언제나 나라의 민주화와 인권문제였다. 조선대학교 민주 총장으로 잠깐 외도한 것 빼고는, 변호사의 길을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인권변호사로서 마지막으로 변론에 나선 것은 송두율 사건 때였다. 80세를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호인석에 섰고 변론요지서를 당신의 이름으로 법원에 제출했다. 거기서 이돈명 변호사는 세계적인 학자요, 이름 석자를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송두율 교수가 “나는 결코 북한의 김철수가 아니다”라고 말 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라고, 그 진실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르침을 남긴 아름다운 죽음

개인적으로 나는 그 아들이 나와 동기동창이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데다가 30년 넘게 이돈명 변호사와 산행을 함께 했고 무시로 변호사 사무실과 그 댁을 들락거렸다. 나는 물론, 가깝게 접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돈명 변호사는 한 사람의 법조인이기 이전에 축적된 삶의 지혜와 오랜 경륜을 지닌 스승이었다. 그와 만나고 나면 듣고 배워 깨닫는 바가 많았다. 그의 탁월한 기지와 해학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백범을 따르고 존경했기 때문에 그 발끝이나마 따라가고 싶다며 범하(凡下)라 자호(自號)한 이돈명 변호사는 나더러 백성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라고 우촌(友村)이라는 아호를 내리며 ‘우촌, 우촌’ 하고 가까이 불러주었다.

저녁을 들고 미처 한 시간이 되지 않아 침대에서 자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는 그 죽음도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고종명(考終命)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삶이 좋으면 죽음도 좋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의 죽음은 일깨워주고 있다. 그는 천상병이 그의 시 ‘귀천(歸天)’의 마지막 련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인연을 남겨놓고 편안하게 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잘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이 되고 있다.

올 겨울 들어 불과 한달 남짓 사이에 리영희, 조정하(박형규 목사부인), 이돈명 변호사의 죽음을 연달아 보내면서 공자의 천상 탄(川上 嘆)이 아니더라도 “가는 것이 저와 같구나”(逝者如斯夫)라는 무상(無常)의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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