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단 초대 단장, 아나키스트 ‘박열’을 아시나요?
민단 초대 단장, 아나키스트 ‘박열’을 아시나요?
  • 고영민 기자
  • 승인 2016.11.1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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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 교수, 민단 70주년 기념 포럼서 주제발표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했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을 초대 단장으로 하는 ‘재일본조선거류민단(在日本朝鮮居留民團)’이 1946년 10월3일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결성된 이래 어느덧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나키즘 신봉자였던 박열(朴烈, 1902년 2월3일~1974년 1월17일)은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일왕 암살을 꾀했다는 대역죄로 체포돼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1945년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박열이 이듬해 민단을 창단할 때, 부단장은 이강훈(1903년 6월13일~2003년 11월12일, 광복회 회장 역임)으로 그는 아나키스트 백정기 등과 함께 중국을 방문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암살하려다 체포된 인물이며, 사무총장을 맡은 원심창(1906년 12월1일~1971년 7월4일, 민단 11~12대 단장)도 아나키스트 단체 ‘흑우회’에서 박열과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로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바 있다.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육학부 교수.

(사)해외교포문제연구소(이사장 이구홍)가 재일민단 창단 70주년을 기념해 ‘인물을 통해서 본 민단 70년사’를 주제로 지난 11월17일 오후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포럼에서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東京学芸大学) 교육학부 교수는 ‘재일동포사회의 갈등 기로에 섰던 박열과 김천해’란 주제를 발표했다.

이날 포럼에서 이수경 교수는 아나키스트로서 초창기 민단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박열’과 일본공산당에서 활약했던 공산주의자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모태인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천해(金天海, 1898년~?)의 활동을 중심으로 재일동포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설명했다.

문경 출신인 박열은 경성고보(현 경기고) 3년 재학중 3·1독립만세운동 참여후 중퇴하고 1919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고, 아나키스트 단체 흑도회(黑濤會) 결성에도 참여한다. 그가 조직한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가 일왕 다이쇼와 히로히토 왕세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1926년 연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몇 달 뒤 감옥 안에서 자살 후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열은 출소 후 초대 단장으로 취임해 민단활동을 펼치지만 조직 내부의 세력 갈등에서 밀려나 이승만의 제안으로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잠시 활동을 보인 뒤, 현재는 평양의 심미리 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다. 이 교수는 “그의 삶 후반의 행보에서는 불명확한 부분도 많고 남북한 및 일본과 관련된 공간 속에서 지낸 질곡의 생애도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재일동포사회에서 공산주의 사상운동의 거물로 활약한 김천해는 박열, 김두용 등과 1920년대 일본 사회노동운동 시대에 두각을 드러내고 활발한 사상운동을 전개하다 체포, 수감을 되풀이 했다. 1949년 9월 일본공산당에서 축출돼 1950년 6월15일 북한으로 밀항한 그는 이듬해 11월 조선노동당 대회에서 노동당 중앙위원 및 사회부장으로 취임한다. 58년에는 김일성으로부터 노동훈장을 수여받으나 70년 노동당 대회에서 김천해의 이름이 중앙위원 명부에서 삭제된 이래 소식이 사라진다. 국제 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에 의하면, 김천해는 강제수용소의 명부에 올라 있었다고 전해진다.

▲ 사단법인 해외교포문제연구소(이사장 이구홍)는 민단 창단 70주년을 기념해 지난 11월17일 오후,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인물을 통해서 본 민단 70년사’를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포럼에서 박열과 김천해라는 식민지 출신 두 청년들이 지배국 일본에서 활동했던 시대 공간을 개괄한 이 교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재일동포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한때 동지로서 활동했던 두 인물이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과정은 재일동포사회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을 지나 현재까지 이르게 되는 비극적인 우리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두 사람이 출소했을 때 그들은 우상적 영웅이 돼 있었으나 이미 그들에게는 새 시대로 견인하는 예리한 선견지명은 보이지 않았고, 오랜 격리 시간으로 인해 현실 또는 이상적 목적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체득하지 못한 결과, 각자의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며, “그들의 마지막 선택조차 반드시 그들의 이상과 일치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두 인물을 내세운 재일동포사회의 대립은 70년 세월 속에서도 평행선상에 있고, 모국의 정치적 입장과 깊이 관련되는 만큼 민단과 총련의 단일화, 협력체계는 결코 쉽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박열과 김천해, 시대가 낳은 두 영웅이 진정 영웅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동포사회 대립의 배경에는 동포들 스스로가 일본 속에서 민족단합이란 기회를 찾지 못한 점도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며, 최근의 헤이트스피치와 관련해 “민단은 민단대로, 총련은 총련대로 헤이트스피치 반대를 주장하지만 동포의 결속·동맹관계로 대응하는 강력한 협력체제를 구축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재일동포사회의 갈등 기로에 섰던 박열과 김천해의 행적을 반면교사 삼아 또 다른 위기에 놓여있는 현 재일동포사회의 발전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하고, 동포사회의 갈등 해결은 동포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국가적 현안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날 이수경 교수가 발표한 내용의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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