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수의 문화칼럼] “사람보다 나은 나무의 겨울나기”
[안영수의 문화칼럼] “사람보다 나은 나무의 겨울나기”
  •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총장
  • 승인 2016.12.0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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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 사이에 끼어서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11월을 나는 싫어한다.

▲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IGSE) 총장.

단풍을 즐길라치면 별안간 추위가 닥쳐와 몸을 움츠리게 하다가도 바로 인디언 서머(늦가을의 봄날 같은 화창한 날씨)가 이어진다. 그리고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면 마치 나의 종말을 알려주는 신호 같아서도 싫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이 느끼는 게 아닌가보다.

서정주 시인은 ‘가을비 소리’라는 시에서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라고 썼다. 고은 시인은 ‘가을상업’에서 “가을은/ 가면서 노인을 남긴다/ 그리고 노인의 죽음을 그 위에 남긴다. 하나씩 둘씩”이라고 노인과 가을을 죽음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신경림 시인도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라고 노래한다.

며칠 만에 산책을 나온 이유도 때 이른 추위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나뭇잎 색깔들이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산책로에는 나뭇잎들이 수북이 쌓였다. 곧 나무들은 나목(裸木)이 되어 우리의 마음까지 시리게 할 것이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이별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11월이 싫은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원초적인 외로움이 상쇄되지 않는 달이다.

그런데 오늘은 산책길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부럽다.

이 무슨 노인의 변덕이냐고? 그 이유는 내가 나무에 관해서 좀 유식(?)해진 까닭이다. 늦가을에 잎들이 떨어지는 것은 나무들이 겨울을 위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 의미라는 것을 ‘나무의 겨울나기’라는 기사(조선일보 2016. 10.25)에서 읽었다. 나무가 추위를 대비해 ‘구조조정’을 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동물처럼 추위와 더위를 피해 동굴과 같은 피난처를 찾을 수도, 사람처럼 옷을 입고 벗을 수도 없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혹한을 견디며 겨울을 넘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묘책이 잎과 줄기에 수분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관다발을 막아 나무를 동상에 걸리지 않게 하고 잎을 말려 땅에 떨어트린다고 한다. 즉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위해 앙상한 몸통만 남기는 ‘겨울 다이어트’를 통해 여름에 병해충에 시달렸던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도록 한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자연의 조화인가!

중세시대의 우주관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은 거대한 존재 고리(the Great Chain of Being)에 의해 연결돼 궁극적으로 창조주(God)에 이른다고 믿었다. 피조물의 등급으로 밑바닥부터 무생물, 식물, 동물에 이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동물과 천사 사이에 존재했다. 세계적인 대 문호인 셰익스피어는 탐욕으로 인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쓴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에서 인간은 “천국과 땅 사이를 기어 다니는”(crawling between heaven and earth) 존재라서 동물적인 탐욕과 천사 같은 기질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정의했다.

요즘 대한민국의 국정을 마비시키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는 개인의 탐욕의 절정을 보여준다. 대통령과 40여 년의 친분을 유지해왔다는 이유만으로 국정을 농단하고 그 주변 인물들과 결탁해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전대미문의 추문에 온 국민이 ‘울분장애’로 밤잠을 설치고 있다. 우리가 직접 뽑은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인간에게 놀아났는지에 대해 할 말을 잃고 있다. 정말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의 꼭두각시였을까? 정말 그녀는 40년이나 사귀어 온 최순실의 진면목을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 내지 조장했을까?

온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당선된 뒤에 자기는 남편도, 자식도 없이 국가와 결혼했고 자기의 사명은 국민의 행복을 위해 혼신을 바쳐 일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던 대통령에 완전히 속았다는 기분 때문이다. 대통령을 둘러싼 비선 실세들의 탐욕이 반세기 동안에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국격을 단번에 떨어트렸다는 사실에 국민은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낙엽은 더 많이 떨어지고 은행잎들은 샛노랗게 변해 노란 터널을 만들었다. 나무들은 탐욕이 판치는 세속에서 초연하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겨울채비를 하고 있다.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 스스로의 살을 도려내고 다음 해의 새 삶을 준비하는 나무들의 지혜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왜 실천하지 못하는가?

바로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모두 절제를 모르고 더 많이, 더 높이 소유하고, 오르려고 한다. 그래서 18세기 영국 시인 포프(Alexander Pope)는 <인간론>(Essay on Man)에서 인간의 탐욕을 경계해 분수를 지키고 교만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이성의 교만 속에 우리의 과오 있으니/ 모든 사람들은 제 위치를 버리고 하늘로 치달리고 있느니라.’

오늘따라 바람 부는 대로 흩날려 떨어지는 낙엽들이 아름답다. 마치 아름다운 무희들의 군무를 보는 듯하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사즉생생즉사’(死卽生生卽死)라는 고사성어를 인간은 실천하지 못하는데 나무들은 실천하고 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나의 겨울나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내게도 탐욕은 숨어 있으리라. 이 나이에도 내게 남아있을 세속적 탐욕과 교만을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나무에게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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