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윤의 음식기행] 피그미족과 라면
[안상윤의 음식기행] 피그미족과 라면
  • 안상윤 전 SBS 북경특파원
  • 승인 2017.01.3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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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 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종족이라는 피그미족과 한 달여간 함께 생활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인류의 원시 시절을 짐작케 해 주는 피그미 족의 생활이 흥미로울 것이라는 게 기획의도였다. 피그미족은 아프리카 중앙의 카메룬, 콩고, 자이르,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중앙아프리카, 가봉 등지에 분포해 있다. 우리 제작팀이 찾아간 곳은 아프리카 중부 우간다와 콩고의 경계에 걸쳐있는 이투리 우림지대(Ituri rain forest)였다.

이 마을에 모두 60여 명이 살고 있으며, 10km 떨어진 곳에 40여 명이 사는 또 다른 마을이 있다고 한다. 밀림 속의 섬처럼 마을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그들은 사냥과 채집에 의존해 먹거리를 해결한다. 사냥은 남자, 식물 채집은 여자의 역할이다. 원숭이, 멧돼지, 파충류, 새, 물고기, 벌집 등이 주 사냥감들이다.

 
피그미는 숲 속의 사냥감을 꿰고 있는 탁월한 사냥꾼이지만, 필요한 만큼만 잡는다. 장미 뿌리에서 추출한 독을 화살촉에 발라 사냥감을 겨냥한다. 우리의 냄새 때문에 처음 몇 번은 사냥에 지장을 받았지만, 열흘쯤 지나자 대형 도마뱀과 긴 꼬리 원숭이(colobus)를 사냥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재미나는 것은 잡은 사냥물을 분배하는 그들의 셈법이었다. 나눗셈을 하지 못해 일일이 하나씩 나누는, 그야말로 원시적 셈법이었다.

피그미의 주식은 ‘마토케’라는 바나나처럼 생긴 탄수화물이다. 이것을 쪄서 밥처럼 먹는다. 피그미들이 저녁 식사로 즐겨 택하는 메뉴는 마근이다. 피그미는 옥수수, 마토케, 마근 등에서 녹말 성분을 섭취한다. 당분은 사탕수수와 바나나에서 취하는데 소금과 마찬가지로 흑인들의 시장에서 사냥물과 물물 교환해 온다. 마근은 칼로 다듬은 뒤 아무런 양념 없이 그냥 솥에 쪄 먹는다. 원시사회에는 맛을 내는 양념류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가져간 식수로 밥을 해먹었는데 이것이 피그미의 눈에는 경이로워 보였던 모양이다. 자기들은 식사를 한번 하려면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닌 데 우리는 너무 쉽게 먹거리를 해결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쌀밥을 곧잘 먹었다. 통조림서부터 멸치와 김, 라면, 김치까지 모두 먹겠다고 덤볐다.

 
그러나 워낙 맵고 짠 음식들이라 부작용이 우려돼 일절 주지 않았다. 한 번은 부족의 원로인 아우라제 노인이 라면을 좀 달라고 요구해 왔다. 우리는 난처해졌다. 그는 전직 추장이었을 뿐 아니라 현 추장의 장인이기도 했다.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걱정은 먹고 난 뒤의 반응이었다. 거듭되는 요구에 하는 수 없이 면을 세 번 끓여 기름기를 완전히(?) 없앤 뒤 수프는 뺀 채 면만 주었다.

노인은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토사곽란을 일으키더니 아예 몸져누워 버렸다. 사위인 추장이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지만 이틀이 지나자 불안이 엄습해왔다. ‘저 영감 잘못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추장의 지시가 곧 법인 사회이다. 문명과는 까마득히 떨어져 있고 국가의 통치력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로 와 있으며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상태에 놓여있다는 현실인식이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밤마다 ‘내일은 영감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나는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없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서울서 가져 간 비상약을 줘 볼까 생각도 했으나 악화될 경우 가중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 피그미의 주식은 ‘마토케’라는 바나나처럼 생긴 탄수화물이다. 이것을 쪄서 밥처럼 먹는다.
불면의 나날들이 계속됐다. 노인은 우리 속을 까맣게 태우더니 나흘 만에야 겨우 회복됐다. 우리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순히 기뻤다기보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영감 붙잡고 춤이라도 출 기분이었다.

영감은 그 후 우리 음식을 아예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독성물질을 음식이라고 먹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영감뿐만 아니라 피그미 그 누구도 더 이상 우리 음식을 넘보지 않았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약 주고 병 주는 것’이라는 진실을 확인하는 데 내 목숨을 담보로 삼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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