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코리안] 애니깽, 세실리오 할아버지의 노래 소리
[비바 코리안] 애니깽, 세실리오 할아버지의 노래 소리
  • 정길화 MBC PD
  • 승인 2017.02.17 08: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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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깽' 이야기 담은 세계보도 사진전 수상작[사진=WORLD PRESS PHOTO(www.worldpressphoto.org)]
사진저널리즘에서 세계적 권위를 갖고 있는 단체로 WPPF(World Press Photo foundation 세계보도사진재단)를 들 수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부가 있는 이 재단은 1955년 네덜란드 왕실의 후원으로 사진작가협회에 의해 설립됐다.

WPPF는 해마다 보도사진전을 개최하는데 이번 ‘2017 보도사진전’에서 멕시코 한인 ‘애니깽’의 애환을 담은 사진이 ‘피플’ 중 스토리 부문에서 1등으로 선정됐다(연합뉴스). 수상자인 마이클 빈세 김(Michael Vince Kim)은 아르헨티나 교포 출신 작가로 지금은 영국 에딘버러 등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WPPF 보도사진전은 당대의 이슈, 일상생활, 일반뉴스, 자연, 인물, 스포츠 등 8개 분야에서 시상을 하는데 각 분야는 싱글 부문과 스토리 부문으로 구분돼 있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한 장의 사진과, 여러 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스토리텔링을 별도로 심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올해의 사진’은 AP통신의 사진기자 부르한 외즈빌리지가 작년 12월 터키 주재 러시아대사 피격 현장에서 찍은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 선정됐다.

▲ '애니깽' 이야기 담은 세계보도 사진전 수상작[사진=WORLD PRESS PHOTO(www.worldpressphoto.org)]
WPPF에서 한국계 작가가 수상한 것도 대단한데 그 내용이 한민족의 수난을 표상하는 멕시코, 쿠바의 애니깽 이민자에 대한 것이라 눈길을 끈다. 주지하다시피 ‘애니깽’은 1905년 대한제국 말기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에네켄(henequen 용설란) 농장의 노동자로 일해야 했던 한인들을 뜻한다. 이들의 신산(辛酸)스런 삶은 그동안 영화, 소설, 다큐멘터리 등에서 많이 다루었다. 필자도 2005년에 멕시코 이민 100주년 특집 3부작(대본 김미라, 촬영 최정길)을 연출한 인연이 있다.

마이클 V. 김의 수상작 ‘애니깽(Aenikkaeng)’을 보니 새삼스럽다. 작가는 작품 설명에서 천 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낙원에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거짓 약속을 믿고 멕시코로 왔으나, 그들 앞에는 에네켄 농장에서의 ‘계약 노예’와 같은 열악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대략 멕시코 유카탄과 쿠바에서 반반씩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풀장에서 노는 어린이들, 베일 뒤의 발만 나온 인물,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두 젊은이, 파라솔로 햇볕을 가리는 해변의 여인, 뒷모습을 보이는 늙은이... 등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얼굴이 없다. 네 사람은 정면을 보고 있으나 이들에게도 웃음기는 보이지 않는다. 10장으로 구성된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코리안-마야인의 전통 한복’이다. 아마도 현지인과 결혼한 애니깽 후손이 사는 집인 듯한데 붉은 색 고름에 연둣빛 한복만이 수구초심처럼 벽에 걸려 있다.

▲ 2004년 12월 당시에 촬영한 세실리오 박 김의 모습.
그런데 사진 중의 한 장면이 필자에게 꽂혔다. 기타를 안고 침대에 앉아서 절규하듯 노래를 부르는 노인의 모습이다. 앗 이 분이라면... 혹시 해서 사진 설명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바로 세실리오 박 김(Cecilio Pak Kim)이다.

13년 전 2004년 12월에 진행된 필자의 쿠바 취재에서 만났던 동일인이다. 다행히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한인 3세로 당시 쿠바 아바나 근교에 살면서 밴드의 일원으로 식당에서 노래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당시 예순 일곱이었는데 아직 건강히 계신가 보다. 사진 속의 세실리오님은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

“나는 한인 혈통이지만 쿠바 태생이다. 쿠바노(Cubano)는 태어나면서부터 두드릴 것이 있으면 뭐든 두드린다. 나는 얼마든지 쿠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고 하던 세실리오님의 말이 생각난다. 식당의 무대에서는 쿠바 민요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 나오는 노래들을 불렀다.

▲ 쿠바 애니깽 후손 가족의 모습(2004).
쿠바 음악은 서정적인 선율과 복잡한 리듬이 특징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쿠바의 전통 음악인 ‘손(Son)’이라고 하던 그는 한국의 시청자를 위해서 아리랑, 애국가에 노사연의 ‘만남’까지 부르고 연주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다”며 눈물을 짓기도 했다. 그 세실리오님이 마이클 V. 김의 수상작에 나온 것이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에서 고생하던 이들 중의 일부는 1921년 새로운 기회를 찾아 쿠바로 떠났었다. 쿠바에는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던 것. 하지만 국제 설탕 가격의 폭락으로 이들의 행로는 여의치 않았다. 가는 곳마다 생고생을 해야 했던 애니깽 한인들이었다.

▲ 수상작가 마이클 빈세 김.
마이클 V. 김 작가는 구도나 터치가 매우 회화적이다. 애니깽 한인들의 삶과 표정을 담담히 담고 있다. 10장의 사진마다 회한의 스토리가 유장하다. 이별, 고생, 역경, 그리움으로 점철된 디아스포라다. 이들의 애니깽 이야기가 심사위원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올해는 멕시코 이민 112주년이고 수교 55주년을 맞는다. 지난해 8월 전비호 주멕시코 한국 대사는 마우리시오 V. 도살(Mauricio Vila Dosal) 메리다시 시장을 만나, 한국측이 ‘사회적 기여’ 차원에서 메리다 시에 교육과학 센터를 건립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그리팅맨(Greeting man, 인사하는 사람) 조각을 기증하겠다는 것을 협의했다고 현지 언론에 보도됐다.

이미 메리다에는 지난 2005년 이민 100주년에 즈음하여 한국 정부가 기증한 한멕 우정의 병원이 건립돼 있다. 돌이켜 보면 ‘수난과 인고’의 애니깽이 ‘감사와 보은’의 상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문득 13년 전 ‘만남’을 부르던 세실리오 할아버지의 기타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그의 노래가 더 힘차고 오래 가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정길화(방송인, 언론학 박사)
MBC 다큐멘터리 PD로서, 2005년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에네켄> 3부작을 제작, 방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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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훈 2021-01-10 22:50:41
반가운 기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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