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수의 문화칼럼] “손녀의 피난 보따리”
[안영수의 문화칼럼] “손녀의 피난 보따리”
  •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 총장
  • 승인 2017.04.0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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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교(IGSE) 총장.

며칠 전 초등학교 4학년짜리 쌍둥이 딸을 키우는 내 딸이 가족 모임에서 손녀들이 피난 보따리를 싸서 감춰놓아 황당했다는 얘기를 했다. 어머나! 무슨 이유로? 애들 샤워를 시키고 옷장을 열었더니 옷들이 거의 없어져서 물었더니, 아이들이 배시시 웃으며 뒷방 깊숙이 천으로 된 여행용 가방에 내복과 양말, 옷 두 벌, 바늘과 실, 심지어 건빵까지 감춰놓았다고 실토하더란다.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피난 보따리를 쌌단 말인가? 다음 날 저녁 딸네 집에 가서 손녀들에게 물었다. 친구들이 4월16일 전쟁이 난다면서 피난을 가야한다고, 그래서 피난 짐을 싸두라는 말을 들었단다. 왜 엄마에게 얘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내 질문에 엄마가 들은 체를 않아서 그냥 자기들끼리 건빵까지 준비했단다. 어째서 초등학생들에게 이런 유언비어가 퍼지게 되었을까?

요즘 아이들은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에 노출돼 있어서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지만 어떻게 4월16일이라는 날짜까지 정해진 가짜뉴스가 어린이들에게 퍼졌을까? 전쟁이 나서 피난 가는 것을 마치 가족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을 아이들에게 내가 아홉 살 때 겪은 한국전쟁 경험을 어떻게 들려줄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충주라는 작은 소도시에서 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빨치산에게 총살당했던 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 머리에서 무성영화처럼 선명하게 돌아간다. 8월의 무더운 여름 날 오후 다섯 명의 딸들을 내리 낳고 얻은 9개월 된 아들을 놋대야에 물을 받아 햇볕에 미지근해진 물에 목욕을 시키던 어머니에게 이웃집 아저씨기 대문을 뛰어 들어와 “안 경사님이 총살당했어요!”하고 소리 질렀다. 어머니는 동생을 이웃에게 맡기고 황망하게 달려 나갔다. 난데없이 맑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퍼부어 마당에 내 발목이 잠길 만큼 물이 고였다.

비가 그친 저녁 하늘에는 서른 두 살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피처럼 새빨간 노을이 졌다. 누가 끓여주었는지 열 살부터 세 살짜리 딸들은 마루에 둘러앉아 밀기울로 수제비를 빚어 감자 넣고 끓인 죽을 먹었다.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우리 집은 식량을 비롯한 가재도구를 몰수당했기 때문이다. 서른 살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가 육남매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그리고 자식들이 얼마나 굶주리며 살아왔는지는 짐작에 맡기겠다. 나는 요즘 표현을 빌리면 흙수저도 아니고 무수저 출신이다.

1950년 이후 67년째다. 나처럼 전쟁을 몸으로 겪은 사람들과 겪지 않은 사람들의 안보관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한국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참상과 굶주림을 얘기하면 마치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로 치부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구소련의 이념대립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는 아직도 준전시 상태이다.

더구나 요즘은 한국이 마치 동네북이라도 된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우선주의로 자국을 위협하는 북한을 선제공격할 태세이고, 일본은 소녀상을 빌미로 자국 대사를 소환해 몇 개월째 귀환시키지 않았다. 한 술 더 뜬 중국은 사드 배치를 반대해 자국민들에게 혐한 감정을 부추겨 관광, 정치, 경제, 외교, 연예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을 골탕을 먹이고 있다. 이런 위중한 시기에 국가통수권자가 구속되고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은 북핵 대책보다 표를 얻기 위한 온갖 포퓰리즘으로 국민의 귀를 오염시킨다.

우리 어린이들이 한반도에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죄일까? 우리의 후손들에게 내가 겪은 전쟁의 참상을 다시 겪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4월16일 전쟁이 난다는 가짜뉴스가 퍼졌는지 학교 선생님들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내가 진료 받고 있는 병원에 비치된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라는 책에서 김종삼 시인의 시 <평화롭게>가 오늘의 내 기도가 된다.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 그 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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