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코리안 문단] 곶감 도둑
[월드코리안 문단] 곶감 도둑
  • 이복희 한국본격수필가협회 회원
  • 승인 2017.08.3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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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희 수필가 
감나무도 해거리를 하나보다. 작년에는 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감이 열렸는데, 올해는 수확이 적다. 당연히 우리 집까지 올 감은 없다. 다행이 아버지께서 곶감을 만드실 만큼은 열렸다. 빨랫줄의 곶감을 만지작대다가 옥상까지 키가 훌쩍 커서 올라온 감나무를 본다. 이 감나무의 나이는 나보다 많다. 감나무를 기억하는 내 첫 기억 속에서도 담 너머로 주렁주렁 달린 감을 보았으니까.

아버지는 옥상 빨랫줄에다 곶감을 매달아 두셨다. 군침이 고이며 절로 곶감에 손이 간다. 매달아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주황빛에서 갈색이 돌고 수분이 조금 빠져나가 말랑한 감촉이 좋다. 눈치 볼 것도 없이 하나를 뚝 떼어 반을 가른다. 달콤한 향이 감돈다. 몇 번 우물거리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이 앗아갔다. 게눈 감추듯이 하나를 뚝딱 해버렸다.

올해는 추석이 일렀다. 한 낮은 아직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제수용품을 장만하는데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추석에 맞춰 추수를 하기엔 무리였다. 햇밤은 구할 수도 없고 대추도 쪼글쪼글한 묵은 대추뿐이었다. 사과나 배도 명절을 쇠기 위해 일찍 거둬들여 맛과 때깔을 갖춘 것은 찾기 힘들었다. 그중 감은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키위나 메론 등 수입과일을 제수로 장만하기에는 영 마뜩찮았다.

푸르뎅뎅한 땡감을 앞에 놓고 고민에 빠졌다. 예전 같으면 땡감을 미지근한 소금물에 삭혀 침시를 만들기도 했다. 이것을 구입하자니 볼썽도 좋지 않거니와 맛도 나지 않은 것을 구색만 갖추려 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제대로 익은 단감이라면 붉은 주황빛이 돌며 코끝에 대면 단내가 솔솔 나야했다.

내키지 않는 감을 들고 보니 풋내가 나는 듯했다. 그래도 차례 상에 감이 빠져서 될 일이 아니었다. 재래시장 여러 곳을 뒤진 결과 조금 살색이 도는 감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곶감을 여기저기 찾아 다녔다. 감도 덜 익은 판국에 곶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묵은 것뿐이었다. 그럴수록 하얀 분이 나는 우리 할머니 곶감이 눈앞에 선했다.

지금처럼 주전부리가 많지 않은 학장시절. 한창 클 시기인 오빠와 나는 껄떡이처럼 금방 밥을 먹고도 어디 먹을 게 없냐며 껄떡거렸다. 출출해지는 늦가을 밤이면 오빠랑 나는 도둑고양이가 되었다. 마당의 빨랫줄에 달린 곶감이 표적이었다. 초저녁잠이 많으신 할머니가 빨리 주무시기를 고대했다. 낮에는 햇볕을 쬐게 곶감을 그냥 두다가 저녁이면 서리를 맞는다고 비닐로 덮어 두셨다

우리는 부스럭 소리가 나지 않게 극도의 긴장을 해야만 했다. 괜히 고양이 소리도 내어보고 안하던 헛기침도 해댔다. 망을 보는 콩닥거리는 심장소리가 할머니께 들릴까봐 조바심을 냈다. 오빠는 대범하게 거사를 잘 해냈다. 하룻밤에 두세 개 이상은 손을 대지 않았다. 혹여 개수가 많이 비면 들통이 날 수 있으니까. 그야말로 고수들만이 할 수 있는 완전범죄였다. 두 사람이 한 손이 된 범행은 곶감이 익어가는 동안 밤마다 이어졌다.

그때 먹던 곶감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반을 가르지도 않고 말랑말랑한 껍질을 붕어빵 주둥이 베어 물듯이 물면 달짝지근한 즙이 입안으로 쏘옥 빨려 들어왔다. 씨를 둘러싼 미끄덩한 부위를 발라먹는 맛도 기가 막혔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씨앗이랑 꼭지는 담 너머로 던져버리거나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장롱 밑 깊숙한 곳으로 튕겨 넣었다. 그리고 둘이서 마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할머니는 비닐을 걷고 빨랫줄에 간격을 맞춰서 곶감을 내어 널었다. 그리고 매일 곶감의 개수를 세는 것이었다. 간이 쪼그라들었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는 호랑이 할머니로 소문이 날 정도로 무서우셨다. 우리의 범죄가 발각 되는 날에는 할머니의 따끔한 회초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곶감을 세는 동안 우리는 그 곁을 얼씬거리면서 수가 헛갈리게 이것저것 여쭤봤다. 다행이도 할머니는 모르시는지 알고도 모른 체 하시는지 곶감의 개수만 확인하시고 지나가셨다.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이 되면 곶감이 적당이 말랐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에 서리가 앉듯이 곶감에도 하얀 서리가 앉았다. 예전에는 곶감의 표면이 왜 하얗게 되는지도 몰랐다. 단지 쫀득하며 달달한 맛에 하나라도 더 내 몫을 챙기기에 눈이 번득였다. 어른이 되어서야 그 하얀 가루가 감의 당분이 밖으로 배어 나와서 하얗게 변한 것을 알았다. 흰 가루가 배어나온 곶감 맛에 남매는 밤도둑이 되어 가을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작년 담 너머에 있는 감나무 한 그루에 감이 잘 되었다고 아버지께서 감을 주셨다. 얼추 백여 개가 되었다. 남편은 감을 깎고 나는 실에 매달아서 베란다 빨래걸이에 달았다. 베란다로 들어오는 가을빛에 날이 갈수록 곶감의 형태를 내었다. 아이들에게 곶감을 서리 해먹은 이야기를 하며 먹어보라고 권했지만 이야기에만 관심을 보일 뿐 곶감 맛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뭐 이런 맛.’ 시큰둥했다. 어쩌랴. 자라온 시대나 환경이 다르니 당연히 입맛도 다른 것을. 내 입맛에 맞는 곶감이 다 내 몫이 된다는 것에 흡족할 수밖에.

희한하게 우리 집 곶감은 하얀 분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 곶감에는 어김없이 하얀 분이 생겨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알고 보니 기온이 맞지 않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리니 하얀 분이 생길 리가 없다. 다행히 냉장실에 넣어두면 하얀 분이 생긴다고 해서 넣어 뒀지만 아버지의 곶감 같지 않았다. 곶감을 만드는데도 통풍이 잘되고 빛이 제대로 들어오는 자연 상태가 최적의 조건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

이젠 친정에 와도 오래도록 익숙하게 남아있는 것들이 차츰 사라지고 없다. 감나무도 수명이 다해가는지 굵고 오래된 가지는 썩고 부러지고 가느다란 새 가지만 올라오고 있다. 머지않아 이 감나무도 수명을 다 할 것이다. 그래도 감나무가 내게 준 곶감의 맛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필자소개
2010년 문학시대 수필로 등단, 한국본격수필가협회, 금오산문학회, 형상시문학회, 구미낭송가협회, 구미사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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