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고 싶은 한국의 역(駅) 11] 경부선 남성현역
[가보고 싶은 한국의 역(駅) 11] 경부선 남성현역
  • 구리하라 가게리(栗原景, 일본 포토라이터)
  • 승인 2017.09.0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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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 개통해 식민지배 떠받친 터널이 지금은 와인터널로

▲ 청도 와인터널 입구
“어이, 빨리 플랫폼에서 떠나세요.”

막 내린 ‘무궁화호’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역사에서 역무원이 나오더니 손짓했다. 부산에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거리의 경부선 남성현역이었다.

구내 건널목을 건너자 역무원은 난간에 자물쇠를 채웠다. 자유롭게 홈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역무원이 안내했을 때에만 개표구를 열어 열차별로 개찰했다. 과거에는 일본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던 방식이다. 대합실의 시간표를 보면, 정차하는 열차는 하루 상하행선 각 4편. 필자 이외에 다른 승객은 없었다. 한국의 대동맥 경부선에도 이런 옛 모습의 역이 남아 있었다.

역 앞에는 몇 채의 민가 외에는 감 모양을 한 관광 안내판이 있을 뿐이었다. 단감이 이 지역의 특산이다.

역에서 왼쪽 산 속으로 1km 정도 걸어가자 조금 전까지의 촌스러운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바뀌어, 관광객이 많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감의 오브제로 장식된 클래식한 터널이었다. 청도 와인터널이었다. 청도 지방의 특산품인 감을 사용해 와인을 제조하는 청도 감와인 회사가 운영하는 와인 창고다. 1904년 완공되었으며, 1937년까지 쓰이고 있던 옛 경부 철도의 성현터널을 재활용한 시설이다.

터널 안에는 1년 내내 섭씨 15도, 습도 60~70%가 유지돼 와인의 숙성, 보존에 최적의 환경이다. 입구에서 200m 정도가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와인 판매 카운터와 유료의 시음 코너가 있다. 관광용으로 다양한 장식이 되어 있지만, 터널 자체는 철도시대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다.

많은 행락객으로 북적이는 와인 터널. 하지만 복잡한 역사를 짊어진 곳이다. 터널이 완성된 1904년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대립한 일본 정부는 경부선 철도 건설을 서둘렀지만 길이 1015m의 성현터널은 건설에 8년을 소요한 최대의 난관이었다. 이 터널의 완성으로 서울과 부산은 철로로 연결되어 러일전쟁 중인 1905년 1월1일, 전 노선이 개통한 것이다.

그러나 경사가 매우 급한 성현터널은 철도 터널로서의 수명은 짧았다. 1937년 경사를 완화하고 수송력을 증강하기 위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남성현 터널이 완성됐다. 옛 성현터널은 개통한 지 30여년 만에 폐기했다. 그 후 도로에 전용돼 1960년대까지는 국도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터널이 20세기 초 건축·산업 기술을 현대에 전한 문화재로 인정받아 관광지 ‘청도 와인터널’로 오픈한 것은 2006년 3월이다.

객석에 앉아 1잔에 4000원 하는 프리미엄 감 와인을 시음했다. 순간 강한 산미가 입 안 가득 퍼졌고 곧이어 상쾌한 감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게 했다. 너무 쉽게 넘어가는 독특한 와인으로 대통령 취임식이나 국제회의의 파티에서도 쓰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를 떠받친 철도 터널이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오리지널 와인을 키우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와인을 맛보고 신나게 터널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어쨌든 운 좋은 터널이라 생각됐다.
 

▲ 남성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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