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코리안 문단] 애프터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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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복희 (수필가)
  • 승인 2017.10.05 0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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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희 수필가
아이들이 불쑥 호박범벅이 먹고 싶단다. ‘그래! 호박이 있었지.’ 지난해 늦가을 친정아버지가 주신 호박을 빈 박스로 방석을 해서 주방 한쪽 탁자 아래에 모셔두고는 잊고 있었다. 호박은 노쇠해 가는 뒷방 늙은이처럼 서글픈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손끝도 들어가지 않던 단단함에다 은은한 윤기마저 품었던 황금 낯빛은 온통 쭈글쭈글 검버섯이 앉았다. 곰팡이에게 내어준 몸은 군데군데 푹 꺼지고 꺼멓게 썩어가고 있었다.

죄스러운 마음으로 늙음을 열었다. 얼키설키 실핏줄로 꿰맨 속살 속에서 씨앗이 콩나물처럼 길쭉한 새 생명을 틔우고 있었다. 불치병에 걸린 산모가 뱃속의 아이를 품고 있는 모습 같았다. 호박은 제 몸이 썩어가는 동안에도 고통을 견디며 어린싹에게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온 마음을 쏟았을 것이다. 이집트의 미라처럼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으로 다음 생의 부활을 믿으며 버터 왔을지도 모른다.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면 벌집을 건드려 놓은 듯 정신이 없다. 대학생인 두 딸아이 살림을 내주는 일이 만만찮다. 목록을 체크하며 빠트린 것 없이 준비해서 보냈다고 해도 줄줄이 카카오 톡이 날아든다. 어제는 큰아이가 오늘은 작은아이가 빚 독촉을 하듯이 성화다. 사서 쓰면 될 것도 일일이 보내달라고 한다. 귀찮기도 하지만 베이스캠프로써 물자 조달에 차질이 없도록 우체국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든다.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 나르는 어미 제비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지원할 목록은 늘어만 간다. 금전은 필수 항목이고, 물자지원은 당연 항목이고, 시간은 덤으로 제공된 항목이다. 거기에다가 사랑과 관심은 태내 장기보험 항목이고, 근심과 걱정은 추가항목으로 가입되어 있다. 가려운 곳은 긁어주고 아픈 곳은 어루만져주고, 부족한 곳은 채워주는 부모의 서비스는 눈감을 때까지 연중무휴 끝이 없다. 주말에 아이들이 다녀간다고 하면 처음에는 아비어미 동생이 보고 싶은가보다 했다. 천만에, 친구들 실컷 만나고 지칠 때쯤 집은 재충전의 장소일 뿐인 것 같았다. 나도 그랬거늘 서운할 것도 없거니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달랜다.

차용증서 한 장 안 써주고 받은 부모님의 사랑을 이제 내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에게 갚고 있다. 당연, 그 빚은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빚이다. 갚지 않는다고 채권자의 압력이나 압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채무자가 몸에서 마음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것이다. 먼 윗대로부터 할머니에게 어머니에게로 다시 내게,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는 또 그 아이에게 대물림 되는 빚이리라. 땅속에 묻혀서도 분명 자식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부모님은 SOS를 보낼 때마다 만사를 제치고 달려와 주셨다. 어머니는 산후조리를 손수 해주셨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미역국을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셋째가 태어났을 때는 일흔 가까운 연세로 몸도 쇠약하고 허리가 좋지 않으셨다. 꾸부정한 허리로 아픈 내색 한 번 안하시고 나와 외손자를 보살피셨다. 미역국이 퍼지면 맛이 없다고 매끼마다 새로 끓여 식지 않게 뚝배기에 담아내셨다. 친정 안방에 앉아 노모의 밥상을 받아먹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 가지 재료로 여러 음식을 해 내는 어머니는 요리사 못지않으셨다. 내가 어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아이들에게 보낼 반찬을 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 밑반찬으로 하다 보니 늘 그게 그거다. 손수 기른 제철 재료로 한 보따리씩 싸주시던 어머니의 정성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어린 호박잎을 따서 잎맥 따라 솜털 가시를 벗겨, 손으로 살살 부며 부드럽게 만들어 구수한 된장국을 끓여 내던, 그 손맛의 주인은 시간의 기억 속으로 떠났다.

오로지 자식만을 바라보며 해바라기해 오셨다. 맛있는 음식을 드시러 가자고 해도 ‘됐다.’, 병원에 모시고 간다고 해도 ‘더 아프면 데리고 가 달라.’, 늘 ‘필요 없다.’, ‘너희들이나 잘 먹고 잘 살라.’고 하셨다. 촘촘히 박힌 호박씨 같은 자식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미덕으로 알고 한뉘를 사셨다. 물기 없이 서걱대는 갈대처럼 어머니의 몸에서 나는 언어의 의미를 그때는 몰랐다. 이제야 대략이나마 짐작하겠다.

요즈음 들어 부모 노릇이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잘 먹이고 잘 재우는 기본적인 욕구만 채워주면 만족해했다. 아이는 커 가는데 부모가 그 성장 발달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아이들과의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막내를 가르치려 들면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냥 잘해낼 거라고 믿고 격려만 해 달란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부모의 사고나 지적 수준도 자식과 함께 성장하고, 경제적 능력도 함께 뒷받침이 되어야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호박도 제 몸이 썩어가면서도 새로운 싹을 틔우는데 하물며 우리네 인생사는 오죽할까.

호박범벅은 아예 물 건너갔다. 봉지에 주섬주섬 썩은 호박을 담으며 고민에 쌓였다. 그냥 버리자니 어린싹과 새 생명을 틔워 올린 늙은 호박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시골 가는 길에 가져가서 포도밭 거름자리 옆에 묻었다. 물이 올라 폭신해진 땅을 톡톡 건드려 본다. 때가 오면 벌들이 붕붕 팔자 춤을 추며 호박, 그 노란 꽃에 깊은 입맞춤을 하리라. 어머니 모습이 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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