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기] 다시 걷는 연행로
[참가기] 다시 걷는 연행로
  • 황승수(웅악 제2고중 2학년)
  • 승인 2017.10.09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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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문화 교류 ‘청소년 사신단’ 단동에서 심양까지 탐방

연행로 답사 참가에 고민이 많았다. 주최가 한중친선우호협회라서 중국학생들과 토론도하고 답사 후기도 제출해야 하니 심적으로 부담이 컸지만 한국에 계신 아버지에게 순식간에 설득당해서 가기로 했다. 역시 아버지 말에는 마법이 깃든 게 분명하다. 옛날에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 “어차피 온 거 편안히 즐기다가 가라”(旣来之则安之). 홍찬수 영구한국인회 부회장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두면 좋다고 하셔서 학교 다니는 동안 틈틈이 읽었고 상권, 하권 모두 다 읽었다.

심양(沈阳)에서 6시30분 시작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참가하는 예본이는 어둑어둑한 새벽 3시에 잉커우에서 출발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심양사범대학교(沈阳师范大学)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올랐다. 항상 느끼지만 중국인들은 부지런하다. 6시인데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차와 사람들이 가득하다. 심양사범대학교 옆에는 고생물박물관이 있었다.

▲ 심양사범대학교 앞에서 ‘연행 길로 다시 걸어보기’출정식이 열렸다.
평상시에 생물 쪽에 관심이 상당히 많아서 지금 이 박물관을 못보고 가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어쨌든 심양 사범대학교에서 단체 티셔츠와 모자를 받았다. 앞에는 ‘중주연행로(重走燕行路, 연행길로 다시 걸어가다)’가 쓰여 있고 뒤에는 우리가 가야할 행선지가 그려져 있었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면 아무나 찾아서 등을 보면 되는 이 놀라운 시스템, 대단하다. ‘연행 로’는 연경(북경의 다른 이름)으로 향하는 길이란 뜻이다. 행선지를 보니 ‘열하일기’ 상권의 행선지와 같다.

6시 반이 됐고 모든 학생들이(나와 예본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심양사범대학생이다) 자리에 모였다. 대학 교수님들이 훈화말씀 같은 걸 하시는데 요점만 말하자면 “연행 로는 조선 왕실이 중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던 길로 중국과 조선의 우호관계를 상징했고 이 길을 보존하고 직접 보면서 현재의 중국과 한국의 우호관계를 이어나가자”는 것이다.

주최단체가 중한우호협회이니 이름에서부터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일행은 단체사진을 찍고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 상태가 좀 부실했으나 못 탈 정도는 아니었다. 중국 방송국 기자 몇 명도 동행을 했다.

모두들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버스에서 단체로 꿈나라로 향했다. 나는 해가 떠있으면 잠을 못자서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단동이다. 실제 열하일기 내용 그대로 가려면 북한의 신의주에서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너 단동을 가야 하지만 우린 한국인이므로 그냥 단동에서 연행로의 첫걸음을 디뎠다. 솔직히 단동은 여러 번 와봤지만 처음 왔다고 생각하고 돌아다녔다. 압록강의 끊어진 철교도 다시 가보았다.

▲ 황승수(웅악 제2고중 2학년)
6.25전쟁당시 UN군이 중공군의 남침을 막기 위해 폭파시킨 다리이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전주비빔밥’이라는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역시나 중국인 입맛에 맞게 모든 음식이 너무 달다. 밥을 먹는 김에 이틀의 여정을 함께할 대학생 형 누나들과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한 한국인 형이 나한테 “영국에서 중국인학교 다니니?”라고 물어봤다. “...예?” 순간 당황했지만 언제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영국이 아니라 잉커우(영구营口)에서 왔어요.” 그때서야 사람들이 이해를 했다. 이해하다 못해 모두들 웃느라 테이블이 난장판이 됐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알게 됐는데 연행로에 참가한 한국 학생들이 중국어를 못하거나 유창하지 않았다. 왜 중국으로 유학을 온 걸까? 원래 중국 대도시에 사는 한국인들은 중국어 못한다. 한 중국인 누나는 예본이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을 했다고 한다.

예본이한테 너희 학교 출신선배가 있다고 알려주니 그 누나랑 예본이가 금방 친해졌다. 점심을 먹고 다음 목적지 관제묘로 갔다. 관제묘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데 중국인들은 지금도 관우를 재물의 신으로 모신다. 관우를 재물의 신으로 모시는 이유는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관제묘를 방문할 때 자세히 써놓았다.

원래는 상인들이 도적의 습격을 받지 않으려고 관우 상을 들고 다녔으나 그 의미가 변질되어서 재물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종교적 목적이 없이 연행 로의 한 부분으로써 참관했다. 동양느낌이 정말 물씬 풍기는 사당이었다.

우리는 배를 타고 압록강을 한 바퀴 돌았다. 바로 강 건너가 북한이다. 북한 상인들도 배를 타고 관광객들에게 장사를 한다. 여러 번 봐서 그런지 신기하진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한 형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중국 방송국에서 인터뷰도 해주다니! 굉장히 탐이 났다. 다음 인터뷰를 내가 해보았으면 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다음 목적지는 구련성 중강세무처(九连城中江税务处)의 유적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현재시대의 출입국 관리소 같은 장소다. 그러나 정작 내려서 가보니 시골 초등학교 교문 앞에 바위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 바위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중강세무처’라고 쓰여 있었다. 국가보호 문화유적이라면서 돌멩이 하나만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바위도 한번 절단된 흔적이 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여기 왔을 때 어땠을까? 열하일기를 읽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넓디넓은 갈대밭, 말소리와 사람소리가 끊이질 않고 천막으로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생각이 났다. 여긴 사절단들이 노숙을 하던 곳이다. 연암선생이 축축한 곳에서 하룻밤 잠을 자고 피부병에 걸려 고생한 일화가 생각나 혼자 피식 웃었다.

저녁이다. 오늘 우리의 임시거처는 용원온천호텔(龙苑温泉酒店)이다. 조선당시 오룡배온천이라고 했었다. 내 기억 상으로 열하일기에서 박지원 선생이 온천에서 가려움증을 해결했다. 선생님 말로는 중국 동북3성 4대 온천이라 했는데 내부를 보니 영 별로다. 집 앞 수영장과 같았다. 물에 들어갈 옷도 안 챙겼고 그냥 온천을 가지 않기로 했다.

역시 중국에선 함부로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나랑 같은 방에서 지낼 룸메이트 형은 교환학생으로 중국에 온지 3주밖에 안됐다고 한다. 저녁은 중국음식인데 한국인 배려 차원인지 간이 싱겁다.

나는 중국의 팍 쏘는 향신료 맛을 좋아하는데 안타깝다. 방으로 가서 룸메이트 형과 서로 중국생활의 고단함과 중국의 맛있는 음식들을 얘기하며 친해졌다. 음식얘기를 하니 출출해져서 음식을 사러 근처 마트를 찾았다.

 
중국인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벌써 거리에 사람들과 차가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마저 부실해서 켜지다 말다 한다. 마치 한편의 공포영화다. 오싹한 길목을 지나 문을 닫으려는 마트를 발견하고 황급히 들어갔다. 각자 먹을 것과 마실 걸 사들고 나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혼자 말을 했다. “야밤에 젊은 것들이 싸돌아다니네...” 우리 한국인 입장에선 9시 반이 늦은 시간은 아니다. 사실 중국인들이 빨리 잔다기보다 한국인들이 늦게 잔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내일도 일찍 출발하기 때문에 씻고 일찍 잤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는 뻣뻣하고 얼굴엔 최근에 안 나던 여드름이 났다. 연암선생의 가려움을 치료한 온천을 안 간다고 하니 물이 나를 싫어하나 보다. 아침은 역시 중국답게 죽과 빵, 싱거운 반찬들이었다. 아침엔 입맛이 없지만 그래도 힘든 여정 길 든든하게 배에 억지로 넣고 출발을 했다.

졸려서 이동하는 동안 다들 잠을 잤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변문이다. 이곳도 옛 조선 사신단이 지나가던 길목이다. 그중 박지원이 실제로 방문했던 장소가 있는데(열하일기의 개그요소가 나왔던 곳이라 혼자 피식 웃었다) 건물은 그대로지만 내부는 공장으로 개조됐다.

마을 주민들이 무슨 일로 버스가 시골마을에 왔나 궁금해서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혼자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왔는데 기자가 나한테 “학생 방금 내용 다 잘 들었니?”라고 물어봤다.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속으로 아차! 했다. 인터뷰기회를 놓쳤다. 결국 다른 형이 어색한 중국어로 인터뷰를 했다. 다음 인터뷰는 기필코 내가 하리라!

다음으로 우리는 봉황성에 도착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새로 사귄 중국 친구들과 술에 뻗어 하루를 보낸 그곳이다. 그곳에서 ‘문’씨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 말로는 문씨 가문은 대대로 조선사신단들의 통역관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할아버지와 그 아들은 한국어를 못하신다.

과도한 흡연으로 후두암치료를 받으신 할아버지는 목소리가 잘 안 나오신다. 희미한 목소리로 “우리 집 가보 일세”하면서 낡은 책을 보여주었다 통역관의 일기 같은 것이었다. 보존 상태나 내용을 봐서는 가보 수준이 아닌 박물관에 기증해야할 문화유산 수준이다.

난생 처음, 400년 전에 쓴 책을 유리벽 없이 직접 만져 보고 읽어보았다. 봉황 성 옛 건물도 남아있다. 들어가서 구경해도 된다고 한다. 들어가 보았는데 유치원으로 개조되어서 아이들의 낙서가 벽에 잔뜩 그려져 있고 여기저기 파손이 심각하다. 분명 여기도 밖에 ‘국가보존역사유적’이라고 쓰여 있는데 말이다.

대체 중국 정부는 유적으로 지정해 놓고 그 후에 하는 일이 뭘까? 유적이라는 타이틀로 높은 땅값에 팔아버리는 걸까? 다른 유적이나 유물들도 이렇게 보호받지 못할 처지를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힌다. 기자들이 학생 몇 명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호, 기회가 왔다.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보니 중국어를 못하는 한국선생님의 인터뷰를 통역해 달라는 것이었다. 좋아! 여기서 나보다 중국어를 잘 하는 학생은 예본이 말고 없다. 당당하게 손을 들고 가서 “제가 통역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성공했다. 나는 선생님이 느끼고 본 것들을 중국어로 기자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물론 내 관점을 약간 섞었다. 내가 직접 인터뷰를 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됐으니 80% 만족했다.

다음 목적지를 살펴보니 거리가 상당히 멀다 연산산(连山关)까지 꽤 멀리 간다. 중간에 있는 심양도 중요한 도시인데 살펴보고 가지 않는 건가? 생각해보니 심양은 어차피 출발지점이고 대도시라서 유적들이 파괴된 듯하다. 한 중국인 선생님이 “왜 번시(본계, 本溪)를 지나지 않고 힘들게 심양을 거쳐 리아오양(요양, 辽阳)까지 가죠?”라고 물어봤다.

심양은 청나라의 첫 번째 수도이기 때문에 청나라가 조선 사신들에게 꼭 방문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어느새 사신단들이 지나가는 가장 높은 산, 마천령(摩天岭)에 도착을 했다.

이름 그대로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산’이다. 랴오닝 성에서는 넓게 드리운 평원위주의 지형이지만 흔치 않은 산맥이 눈앞에 있다. 마치 강원도 산맥을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옛 사신단은 이곳을 지나가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고 하나 우리는 현대 문명의 산물, 차를 타고 45분 만에 험난한 산길을 지나갔다.

점심을 먹기 위해 첨수(甜水)에서 내렸다. 마을 이름이 ‘단물’이라니. 참 신기하다. 산꼭대기 식당에서 먹는 중국 시골 밥상은 참 맛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량피(凉皮,중국 중원지역 전통음식. 고소하면서 쫄깃쫄깃하다)에다가 웬만한 한국인들도 거리낌 없이 먹는 ‘파, 계란 볶음’도 있었다. 점심을 꽤 든든하게 먹고 출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식당 앞에 농장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중국의 농촌 집은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이다. 나는 집주인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도시에 온 촌놈마냥 촌을 구경을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사신다고 한다. 할머니는 현지 방언을 쓰고 나는 전형적인 랴오닝성 사투리를 표준어와 섞어 쓰니 대화가 참 웃기다. 제3자 눈에는 경상도 방언을 쓰는 할머니와 충청도 방언을 쓰는 외국인이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출발할 때가 됐다. 나는 할머니께 가을에 풍년을 기원해주고 차에 탔다.

다음 목적지는 청석령(青石岭)으로 사신단들이 지나가던 산길이라고 한다. 산길을 직접 걷는다는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지만 역시 고난의 산길은 걸어야만 했다. 그래도 3~4백년 전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는다니 느낌이 신기했다.

 
이 길은 중국이 딱히 보존구역으로 지정해 놓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전에 본 유적들보다 더 잘 보존된 기분이다. 전화위복, 딱히 보존을 안 하는데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 더 잘 보존됐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등산을 하던 중 눈앞에 흰나비 한 쌍과 노랑나비 두 쌍이 짝지어 날아다녔다.

마치 영화 속에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주위를 잘 보니 네발 나비, 산부전 나비 등 나비가 참 많았다. 박 각시가 풀밭을 날고 방아깨비와 곤충이 사람의 발길을 피해 도망 다니기 바빴다. 엉겅퀴 꽃밭에는 ‘가뢰’(딱정벌레)들이 꿀을 빨러 오는 벌들을 노리고 무리지어 있었다. 내가 공포증이 없어서 참 다행이다.
여러 신기한 식물도 있었는데 식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무슨 식물인지 잘 모르겠다.

또 처음으로 야생 뱀을 보았다. 잡아서 무슨 종인지 확인하려 했으나 금방 전투태세를 취해 위협하고 도망을 가버렸다. 더 이상 사람이 갈수 있는 길이 없어서 단체사진을 찍고 하산을 했다.

내려오면서 한 심마니 할아버지가 뱀의 허물을 들고 있었다. 적어도 내 동생 크기의 뱀 같았다. 옛날 그 당시 사신단은 대체 어떻게 방대한 인원과 마차, 수레를 이끌고 이 뱀이 우글거리는 험준한 산길을 지나왔을까?

다들 차에 다시 올라 탔을 때는 이미 녹초가 된 후였다. 마지막 목적지 백탑에 도착했다. 이름그대로 새하얀 탑인데 상당히 거대하다고 불상이 곳곳에 새겨져있었다. 조선 사신단은 이 탑을 보고 자신들이 얼마만큼 왔는지, 또 북경에 언제쯤 도착할지 가늠했다고 한다.

마지막 저녁은 요양호텔에서 먹었다 내가 원하던 강렬한 향신료 맛이 확 나서 좋았다. 밥을 먹고 잠깐이지만 친해진 형 누나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예본이와 나는 방송국 차량을 타고 근처 고속철 역에서 고속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재 한반도는 화약통 상태다. 언제 북한, 중국과 교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중국인을 예의바르지 않은 후진국 사람으로 본다. 하지만 열하일기 같이 지금도 우리는 중국인들에게 배워야할 게 많다. 또 우리는 그들과 친해져야 한다. 21세기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 시대, 우리는 군사적 수단으로만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외교적으로 평화롭게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것, 우리 유학생들이 평화를 전파하는 것, 역시 일종의 국가보호이다. 다른 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데 힘을 쓰면 우리들이 문화 교류의 ‘청소년 사신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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