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들의 눈물
[기고] 아들의 눈물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7.11.1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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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참으로 건강한 체질이셨다. 일제 치하의 젊은 시절에는 만주와 북해도를 넘나들며 탄광과 부두의 막노동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고 늘 말씀하셨다. 씨름판에서 명성을 날렸다는 자랑도 가끔 하셨다. 40세에 내가 태어났으니 살아계시면 금년에 108세가 되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 년쯤 전이니까 지금부터 20년 전이다. 그렇게 강건하시던 아버지가 언제부턴가 기력을 잃기 시작했다. 자식으로서 생전에 무엇인가 작은 도리라도 하고 싶었다. 용돈을 드려 봤자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시니 의미가 없었다. 생각 끝에 목욕을 함께하며 등을 밀어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천호동 큰형님이 모시고 있었으며 나는 상계동에 살고 있었다. 가끔 큰댁 근처에서 형님 내외분과 저녁 식사를 모셨기에 그날 조금 일찍 출발하면 될 일이라 어려울 것도 없었다.

목욕 행사를 몇 차례 하던 중 한번은 고 3학년인 아들과 함께 가게 됐다. 내가 아버지 등을 밀어드리려고 하자 옆에 있던 아들이 자기가 밀어드리겠다고 했다. 손자가 밀어주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지 아버지는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흐뭇해하셨다. 성의껏 등을 밀며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아들이 여간 대견스럽지 않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데 목욕탕 주인이 “3대가 함께 목욕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했다. 아버지는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우리 손자가 내 등을 밀어줬다오”라며 자랑을 하셨다.

목욕탕 밖으로 나오자 아들이 살짝 다가와 “할아버지가 너무 쇠약해지신 것 같아 눈물이 날 뻔 했다”고 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아버지와 같이 와서 할아버지 등을 밀어드리겠다는 말도 했다. 그 때 내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가슴이 찡하다. 이것이 바로 천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 아들과 함께 갔을 때는 목욕을 마친 후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여유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가 다니시는 경로당 얘기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얻어먹기만 하고 한 번도 사지를 않으며, 어떤 사람은 나오기만 하면 자식 자랑만 늘어놓는다고 하셨다. 고령의 한 어른은 아들이 경로당 어른들께 대접하라고 돈을 줬다며 가끔 설렁탕을 샀는데 알고 보니 자기 용돈을 아껴서 샀단다. 자식 자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얘기 말미에 아버지는 “자식이 직접 방문해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참 보기가 좋더라”고 하셨다.

그날 목욕탕을 나오자 아들이 슬며시 다가와 “아버지도 경로당에 한번 다녀오셔야 되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들도 지나쳐 듣지를 않은 것이다. 철부지 어린애인 줄만 알았는데 눈치가 빠른 것이 참으로 기특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도 경로당에서 자식 자랑을 하지 않았을 턱이 없다. 틀림없이 손자가 등을 밀어줬다는 얘기도 몇 차례는 하셨을 성싶다.

다음번 아버지를 찾아 갔을 때이다. “오늘은 제가 경로당 어르신들께 식사를 한번 대접 하겠습니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의외로 바쁜 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며 돈을 주고 가면 나중에 기회를 봐서 대접하겠다고 하셨다. 아들이 돈을 줬다며 설렁탕을 사던 어른도 요즘은 남들이 다 알게 되어 사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때는 분명 내가 한번 찾아오기를 바라고 말씀하셨을 터인데 그 후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돈만 드리고 그냥 왔다. 돌아오면서 곰곰 생각하니 아버지가 그사이 아들이 돈을 줬다며 이미 경로당 어른들께 대접을 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말씀하셨을 때 즉시 “조만간 저도 한번 방문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가슴 깊이 자책했다.

아들은 입시 공부 때문에 두 번밖에 더는 목욕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물론 내가 가자고 했으면 응했겠지만 더 이상 요구할 수가 없었다. 대원외고에 다니는 아들은 IQ 156의 좋은 머리를 가졌음에도 노력이 부족해 꽤나 애를 태우던 즈음이다. 다행히 그해 말 포항공대에 합격했으며, 그 어렵다는 멘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몇 달 후 아버지가 임종하셨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들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마도 할아버지 등을 밀던 그날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슬피 우는 아들을 보면서 속으로 슬픔을 삭이던 불효자식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경로당에 한번 가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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