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기] 안동 임청각 역사문화 탐방..."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
[동행기] 안동 임청각 역사문화 탐방..."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
  • 이종환 기자
  • 승인 2017.11.21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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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와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공동 주최로 11월10-11일 1박2일로 개최
안동 도산서원 병산서원 하회마을, 영주 소수서원도 방문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항증 선생이 임청각에서 방문단을 안내하고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항증 선생이 임청각에서 방문단을 안내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반석현 후얼란 집창자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한해에 다섯번을 이사했다. 그러자니 붙어 있는 것도, 남아 나는 것도 없었다. 새로 이사간 집은 다섯 칸 집인데 방이 여덟 개나 되었으니 허술하기가 말로 다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손님 다섯 분이 오셨다. 한 분은 이청천으로 함자가 여럿이었으나 해방 후 본성을 찾아 지청천으로 고친 분이었다. 그리고 강재 신숙, 몽호 황학수, 철기 이범석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함자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분들은 그 허름한 집에 오셔서 2박3일 동안 계셨다. 2월 추위에 집에 아무것도 없는데다 당숙모의 우환으로 쌀도 몽땅 없애버려 난감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단행본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구술 허은, 기록 변창애)를 발견한 것은 안동 임청각에서였다.

임청각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의 생가다. 생가 대청 마루에 이 책과 함께 석주 이상룡선생의 유고집, 석주선생의 맏아들인 동구 이준형선생의 동구집이 함께 놓여 있었다. 책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판매용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구술한 허은 여사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 이준형 선생의 며느님이다. 구한말 의병장 허위 집안의 양가 규수로 이상룡 선생의 안동 고성이씨 종가집으로 출가해서 집안을 지켜온 종부다. 그러나 허은 여사의 삶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굴곡에 가장 첨예하게 노출돼 있었다.

“낯설고 물설은 화전현에서 새애기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첫날부터 부엌에 들어가 조석을 장만하려니 장이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땔나무도 없고 식량도 없었다. 간장이나 된장이 없기는 친정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깊은 내륙이라 소금이 귀했다. 오십리, 육십리는 가야 소금을 구할 수 있었다. 농삿거리 서너말은 가져가야 소금한말과 바꾸는데 농삿거리도 없을 뿐더러 또 있다 해도 무거운 걸 지고 그 먼곳까지 갈 사람도 없었다. 바깥어른들은 독립운동 하시느라 주로 외지에 나가 계셨다. 나는 어리기도 했지만 워낙 풍진 생활고 속에서 자라면서 어른들 거취만 보았지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당시 석주 어른께서 군정서 독판을 할 때라 가족 수당으로 매달 쌀 서말씩 나오긴 했으나 늘 부족했다”

시할아버님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임종에 대해서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석주 어른께서는 환후가 나빠지시는데도 미음도 못 가져오게 하셨다. 며칠을 냉수만 떠 넣어 드렸는데 ‘물이 천하 제일이라’ 하셨다. 임종에 임박하여 밥물을 아주 묽게 한 것에 설탕을 타서 넣으라고 해서 두번을 떠 넣어 드렸다. 손을 저으며 못하게 하시더니 이윽고 어음이 흐려졌다. 1932년 오월 열이틀날이었다. 그 전해 가을 추석 지난 얼마후 여시당과 이장녕씨께서 총살당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는 상심끝에 발병하시어 칠팔개월 끌다가 결국 낙명하신 것이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들어가서는 안되니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리도록 하라’고 하셨다. 58년만에 유골은 정부(국가보훈처) 노력으로 환국했으나 아직도 국적은 회복되지 못했다.”

이 구술은 1995년에 이뤄진 것이다. 만주에 있던 석주선생의 유해는 1990년 9월 한국으로 모셔졌다. 일제 호적을 거부해 무호적자로 남았던 독립지사 62명은 2009년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드디어 국적을 회복했다. 이상룡 선생도 이 62명 중에 포함돼 있다.

본지는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이사장 이승률)과 함께 11월10일과 11일, 1박2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무령 이상룡의 역사정신을 고찰하는 안동 영주 역사문화탐방’을 개최했다.

임청각 방문과 학술심포지엄 등으로 이뤄진 이 행사에는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유주열 전 외교부대사, 김희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장 등 서울과 대구 부산 등지에서 150명이 참여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팀은 11월 10일은 서초구민회관에서 전세버스 두대로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 임청각에 닿았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임청각에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동시에서는 부시장도 나와 서울 등 각지에서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격려했다.

임청각 앞으로는 철도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제가 독립운동 떠난 석주 선생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99칸에 이르던 석주 선생의 고택 한 가운데로 철로를 놓았다고 하는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학술행사는 오후 2시부터 안동 국립국학진흥원에서 열렸다.

이승률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국권을 되찾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희생한 애국선열의 정신과 기상을 오늘에 되살려 제2의 건국,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일에 귀감을 삼자는 의미에서 이번 행사를 개최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한민국의 위기국면을 새로운 차원에서 극복하는 화합과 통합의 리더십을 고찰하는 뜻깊은 자리”라고 강조했다.

이어 안동대 사학과 교수인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이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독립운동과 사상’을 주제로 기조발제를 했다.

김관장은 이상룡 선생의 가계와 학통을 소개하면서 “혈연 지연 학문적 유대가 독립운동에서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고 소개했다.

“고성이씨 가문은 이때에도 인근 유력 양반가문과 널리 통혼했다. (석주선생의) 조부 이종태가 금계 의성김씨 종손인 진화의 딸과 결혼하여 서산 김흥락과 처남 매부 사이가 되고, 또 탁암 김도화는 조부의 매부였다. 부친 이승목은 안동권씨 진하의 딸을 배필로 맞아 을미의병장 권세연이 이상룡의 외숙이었고,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의 조주용은 그의 고모부였다. 이상룡은 내앞(천전)마을 의성김씨 진린의 맏딸과 혼인하였으며, 이로서 김대락의 매부가 됐고, 영해 도곡의 무안박씨 종손인 박경종이 이상룡의 매부가 되었다. 또 이상룡의 장남 이준형은 진성이씨 만유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딸은 진주강씨 종손인 호석에게 출가했다.”

김희곤 관장은 석주선생이 본격적으로 의병을 지향하고 나선 때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였다면서 “이상룡은 경남 거창군의 의병장인 차성충과 연락하며 1905년부터 1908년까지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건설하고 항쟁을 시도했다. 그런데 일이 잘못됐다. 차성충이 모병하고 무기를 마련한다는 일이 일본 주둔군에 알려지면서 습격을 받아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다. 이상룡은 이에 영덕의 신돌석 의진과 영주봉화에서 활약하던 김상태 의진에 기대를 걸었으나 신돌석이 사망하고 김상태가 붙잡히는 바람에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했다”고 소개했다.

1910년 8월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상룡선생을 비롯한 안동지역 혁신유림들은 만주 망명을 시도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안동 유림들의 만주 망명은 대가족 단위로 이루어졌다. 많은 식구들의 이동과 정착에 필요한 비용 마련을 위해 대부분 논밭과 집을 팔아야 했다. 그것도 일제의 삼엄한 감시아래 비밀리 준비해야만 했다.

이상룡 선생은 “대지에 그물이 펼쳐진 것을 보았는데 어찌 남아가 해골을 아끼랴. 고향 동산에 좋게 머물며 슬퍼하지 말게나.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 것이다”는 시를 남기고 나라를 떠났다.

이상룡 일가는 1911년 1월27일 압록강을 건넜다. 망명목표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고, 방법은 무장투쟁이었다.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독립군 양성이 급선무였다. 신흥학교 등 수십개의 학교를 만들어 독립군 양성에 나섰다.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친 청년들은 백서농장 마록구농장 길남장 같은 곳에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군으로 성장했다.

김희곤 교수는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이상룡은 30대의 나이에 향촌사회의 운영문제에 주역으로 나서기 시작하고 40대 후반에 의병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방략의 한계를 깨닫고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무장투쟁 노선만은 그대로 갖고 있었다. 만 53세에 만주망명길에 오른 그는 군사기지 건설을 위해 맨 먼저 동포사회를 구축하고 자치기관을 열었으며 교육기관과 병영을 설치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군정부를 수립하고 서로군정서를 이끌면서 김동삼을 비롯한 인재를 지휘하여 독립운동계의 최고 인물로 자리잡았다. 만 68세에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선출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어 정용상 동국대 교수(법학)와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연구소장(국사학), 정연상 안동대 교수(건축학)가 토론에 나섰다. 특히 정용상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법통 승계 논쟁은 국가 발전을 위한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 문제를 이념적으로 재단하면 국론 분열과 국민갈등을 조장할 뿐”이라고 역설했다.

행사 이튿날인 11월11일에는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귀래정, 하회마을 관광이 있었다. 이어 영주로 가서 선비마을과 소수서원도 방문했다.

이번 행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8.15 광복절 기념사가 계기가 됐다. 문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다"면서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로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하지만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다"면서 "아흔 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역설했다.

문대통령은 또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한다"면서, 독립운동의 공적을 후손들이 기억하기 위해 임시정부기념관을 건립하고, 임청각처럼 독립운동을 기억할 수 있는 유적지는 모두 찾아내며,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끝까지 발굴하고, 해외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김정남 전 청와대교육문화사회수석은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든 여행이었다”면서 “임청각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앞으로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소회을 피력했다.

임청각에서
임청각에서
안동국학진흥원에서
안동국학진흥원에서
소수서원에서
소수서원에서
임청각에서 단체 촬영했다
임청각에서 단체 촬영했다
임청각에서
임청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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