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기행] 아라사의 밤
[러시아 문학기행] 아라사의 밤
  • 심희경 한국산문 이사회 이사
  • 승인 2017.11.27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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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문학의 밤에 부쳐

우물가에서도 그는 말이 적었다.
아라사 어디메로 갔다는 소문을 들은 채
올해도 수수밭 깜부기가 패여 버렸다.
(중략)
수국꽃이 향그롭던 저녁
처녀는 별처럼 머언 얘기를 삼켰드란다.
-노천명 <옥서촉>-

러시아가 ‘소련’이라고 불리던 십대 시절에 이 시를 처음 읽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시 속의 ‘아라사’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 이후로 아름다운 옛 이름의 이 나라는 시처럼 이별의 인사도 없이 떠나보낸 애인인양 가슴 깊은 곳에 서늘한 그리움으로 자리했다.

세월이 흐르고 갈 수 없던 붉은 장막의 나라는 갈 수 있는 나라가 됐고 두 번째 러시아 여행을 하게 됐다.

5년 전 처음으로 러시아 문학기행을 할 때는 이십대에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제대로 읽은 유일한 러시아 문학작품이었다. 그에 비해 두 번째 러시아 문학기행인 이번에는 일 년 반 동안 70여 편의 러시아 문학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더욱이 특별했던 것은 우리 일행이 러시아 문인들과 함께 ‘한·러 문학의 밤’에 참여한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밤에, 잡지 <모스크바 프레스>의 주최로 ‘한·러 문학의 밤’이 열렸다. ‘학’ 이라는 뜻의 뮤직 카페 ‘아이스트’로 들어섰을 때,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 작가동맹’ 소속의 문인들 모습이 낯설음과 친근함으로 한꺼번에 다가왔다.

마리나 스크보르초바 시인의 개회사와 역사학자인 고려인 김영웅 ‘러시아 극동 연구소’ 수석 연구원의 환영사에 이어 K팝 오디션에서 1등으로 입상했던 율라 사이키나의 노래로 문학의 밤이 시작됐다.

‘한국산문’의 러시아문학반 회원들이 지난 5월 8박9일간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수즈달, 툴라, 체호프시에 있는 톨스토이, 체호프 등 러시아 문학가들의 생가를 방문했다.
‘한국산문’의 러시아문학반 회원들이 지난 5월 8박9일간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수즈달, 툴라, 체호프시에 있는 톨스토이, 체호프 등 러시아 문학가들의 생가를 방문했다.

우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유명시인들의 시를 낭송했고 러시아 문인들은 자신들의 자작시를 낭송하거나 시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 들려주었다. 사회자와 통역이 내용과 의미를 미리 알려 주어서 큰 어려움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낭송했다.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카페안의 사람들이 가슴속에 느낄 수 있도록 한껏 목소리에 감정을 실었다.

시마다 어울리는 배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다른 작가들의 김춘수의 <꽃>, 윤동주의 <별 헤는 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며>, 노래로 부른 김소월의 <실버들>이 이어졌다. 한국인의 정서가 노래에 담긴 <실버들>이 꽤나 분위기를 촉촉하게 했다.

이어서 문학기행 참가자 모두 무대에 올라 이 날을 위해 연습해 두었던 <백만 송이 장미>를 노래했다. 이때 러시아 문인들 여러 명이 우리의 모습을 사진 찍고 있어서 제법 어려운 노래를 열심히 익혔던 보람을 느꼈다. 후렴구를 러시아어로 ‘밀리온 밀리온 밀리온 알리흐 로스 이즈아크나 이즈아크나 이즈아크나 비지스뛰...’를 노래할 때 주황색 머리의 류드밀라 쿠들로바 시인이 함께 따라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빅토르 알리민 시인은 검은 정장 안에 흰 폴라를 단정하게 입은 백발이 멋진 분 이었다. 그의 수려한 모습은 카페 안에 들어설 때 가장 눈에 띄었었다. 조선시대의 시인 ‘송강 정철’의 시에서 영감을 얻는 등 한국시를 모티브로 한 소네트도 썼다는 그는 <그림자도 밝았다네>, <제발>, <사랑과 전쟁>등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고려인 작곡가겸 가수인 스타니슬라프 박의 노래가 특별하게 들렸다. 눈이 거의 실명 상태라는 그는 <어머니들에게>, <내가 당신을 떠날 때>, <내가 젊었을 때를 기억해>를 우수어린 저음으로 들려주었다. 그의 기타 선율과 노래에 담긴 정서는 스탈린에 의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된 연해주 고려인의 아픈 운명이 서려있는 것 같아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전 러시아 대의원인 에두아르드 바도프 시인은 만 81세의 나이인데도 자신의 시를 늙지 않은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그가 기타를 치며 노래한 <너의 손바닥 때문에 나는 따뜻하네>와 <자작나무 세 그루>는 연륜이 깊은 이 만이 들려 줄 수 있는 발효된 감정이 녹아 있었다. 그의 시에는 혁명과 전쟁을 겪어내고 거센 눈보라를 이겨 낸 따뜻한 봄의 위로가 스며있는 듯 했다.

처음에는 사진만 찍고 있어서 기자인 줄 알았던 알렉산드르 율린 시인은 다른 시인들에 비해 경쾌하게 자신의 시를 노래했고, <푸른 빛으로 나를 물들여라>의 주황색 머리를 한 류드밀라 쿠들로바 시인은 시처럼 푸른 드레스를 입고 소녀같은 분위기를 풍겼으며, 개회사를 했던 마리나 스크보르초바 시인의 <소금으로 시를 쓰고 싶지는 않네>는 제목에서 시의 은유가 풍부하게 느껴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율라 사이키나가 부른 <거위의 꿈>으로 행사가 마무리 되고, 처음 만나 정을 쌓은 밤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에두아르드 바도프 시인이 한복을 입고 ‘별 헤는 밤‘을 낭송했던 우리 작가의 손등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한복의 아름다움과 우리문학에 대한 존중을 본 것 같아 흐뭇한 마음이었다. 말하지 않았어도 윤동주 시인이 <투르게네프의 언덕>을 썼다는 것을, 우리의 사랑하는 시인이 러시아 작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이 음유시인의 입맞춤이 잔잔한 감동이었다.

어느 순간 이들이 푸시킨과 톨스토이와 파스테르나크와 맥을 같이 하는 문인들 이라는 사실이 실감나고 한 공간에서 문학의 옷을 입고 교감을 나눈 것이 더 없이 흥미롭고도 감사하게 여겨졌다. 양국의 아름다운 모국어로 나눈 문학이 서로에게는 외국어였지만 그 안에 담긴 소중한 것들은 충분히 통할 수 있었다.

우랄산맥 아래 하얀 자작나무 숲과 눈 속에서 열린 붉은 마가목 열매 등 그동안 러시아 문학을 통해 서 본 아름다운 정경들이 아이스트 카페 안, 시인들의 노래 속에서 되살아났다.

잠시 카페 창밖으로 빗방울이 비쳤다. 그 옛날 아라사 어디메로 떠났던 시 속의 그가 중앙아시아로, 전쟁터로 떠돌다가 빗방울 되어 이곳 까지 왔을까. 주체할 수 없이 엎질러진 감정이 밀려왔다.

그리웠던 아라사, 이제는 먼 전설에서나 불리어질 그 이름을 모스크바의 밤에 내 가슴에 새겨 넣었다.

필자소개
서울 출생, 한국산문으로 등단, 한국산문 이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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