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物語-14] 오키나와에서 만난 삼한(三韓)
[유주열의 동북아物語-14] 오키나와에서 만난 삼한(三韓)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전 나고야총영사)
  • 승인 2017.11.2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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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국 건국 30년 주조된 평화의 종에 삼한 먼저 기록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고려기와 화제돼
고고학적 관점에서 오키나와와 삼한의 관계 밝혀지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전 나고야총영사)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전 나고야총영사)

최근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과거 류큐(琉球)왕국의 왕궁이었던 슈리성(首里城)을 가 보았다.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쟁 통에 불타고 지금 건물은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 슈리성에는 특별한 종(鐘)이 걸려 있었다는데 전쟁 통에 미군의 공격을 받고 불타 종의 기능을 잃고 현재는 오키나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 종에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첫 구절이 이러하다. “류큐(琉球)라는 나라는 남해의 아름다운 경승지로 삼한(三韓)의 우수함을 모두 갖추었고, 중국(大明)과는 보차(輔車, 아래턱뼈와 잇몸) 관계이고, 일본(日域)과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 관계로 두 나라 사이에서 솟아난 봉래도(蓬萊島, 신선이 사는 낙원)이다. 배(舟)와 노(楫)로서 만국의 가교(津梁)가 돼 각종 물산과 보물이 가득하다.”

琉球國者南海勝地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以日域爲脣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以舟楫爲萬國之津梁異産至寶充滿

류큐국 건국 30년인 1458년에 주조됐다는 이 종은 명문을 따라 ‘만국진량(萬國津梁)의 종’이라고 한다. 당시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의 3국을 통일하여 류큐국을 세우고 칼과 창을 녹여 만든 ‘평화의 종’이라는 별명도 있다. 이 종의 명문 첫 구절 첫 문장에는 중국과 일본에 앞서 삼한(三韓)을 먼저 내 세웠다.

류큐국은 남북으로 중국과 일본과는 비슷한 거리에 놓여 있지만 한반도와는 두 배 이상의 먼 거리에 있음에도 삼한의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삼한 출신의 한 사람으로 류큐국과 특별한 인연을 느꼈다.

류큐국에 우리 선조들이 일찍이 정착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조선조 500년간은 먼 바다를 기피했으나 우리 민족은 본래 해양민족이었음이 여러 역사 자료에 나온다. 일본의 고승 엔닌(圓仁)이 838년 입당(入唐) 시 그리고 10년 후 귀국 시 통일 신라의 선박을 이용한 것이 그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중국의 산동성과 강소성뿐만이 아니라 동중국해의 절강성과 복건성에도 신라방(신라인 거주지역)이 형성돼 있었다고 하므로 복건성에서 멀지않은 류큐에도 신라인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에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고려기와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기와에 제작연대(계유년 1273)와 함께 고려장인이 만들었다는 명문(高麗瓦匠造)이 새겨져 있어 고려와 당시 류큐와의 특별한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1231년 몽골(元)의 침략에 저항하여 강화도를 근거로 항몽을 계속하던 고려의 무신정권이 1270년 원종이 귀국하면서 원에 복속, 개경으로 환도하려고 하자 무신정권의 엘리트 근위병이었던 삼별초는 이에 반발했다.

원종에 대한 설득이 실패하자 삼별초는 새로운 왕을 추대하여 강화도의 각종 재물과 사람들을 실은 대 선단을 이끌고 남해안 진도로 이동했다. 삼별초는 해상력을 기반으로 제주도를 포함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여 항몽 항쟁을 했다.

1271년 새로이 조직된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자 삼별초 잔존 세력이 제주도(탐라)로 건너가 항쟁을 계속했으나 여몽 연합군에 맞설 수 없음을 알고 대 선단을 준비 진도와 제주도 사람들을 싣고 남중국해의 갈라파고스로 알려진 류큐로 집단 이민을 했으리라는 상상을 할 수 있다.

탐라는 류큐까지 한결 가까운 길목이다. 삼별초로서는 사전에 집단 기획이민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최고의 조선 기술을 가진 고려 장인들이 튼튼한 배를 준비하고 기와 장인을 비롯하여 백공(百工)이라고 부르는 수백 명의 각종 전문가들을 배에 태웠을 것이다. 지금도 오키나와에는 제주도와 비슷한 풍속이 많다고 전한다.

‘옛 전설은 역사의 그늘이다(古之傳說 史之影也)’라는 동양의 격언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된 오키나와와 삼한의 관계를 고고학적 관점에서 좀 더 자세히 밝혀진다면 역사의 진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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