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산책] 조선 중기 별서 원림
[정원산책] 조선 중기 별서 원림
  • 박경자 전통경관보전연구원장
  • 승인 2017.12.01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경자 전통경관보전연구원장
박경자 전통경관보전연구원장

조선 건국초기의 왕성했던 새로운 국가 기운은 점차 사라져갔다. 16세기에 임진왜란과 당파싸움, 조세제도 문란 등으로 혼탁한 사회 속에서 16세기를 주도한 사림파의 꼿꼿한 선비들은 혼란한 세속을 피해서 숨어사는 은둔을 택했다. 17세기 병자호란 난리를 겪은 후에도 은둔하는 선비들은 많아졌다.

이들은 지방에 낙향하여 전원 속에서 별서원림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현재 조선의 3대 별서원림이라 꼽히는 소쇄원, 세연정 원림, 서석지 원림이 만들어졌다.

이들 선비들은 오직 성리학만 중시했기 때문에 과학 기술이나 다른 사상은 등한시했다는 한계도 있다. 여기에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에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실학이 성행했다.

담양의 소쇄원
소쇄원은 양산보의 은거지이며 양산보는 송순, 김인후, 정철 등과 교류했고 이들은 담양에 많은 누정을 건립했고 시가문학을 크게 일으켜서 시가문화권을 이루었다. 자연경승지인 폭포와 지형을 잘 활용해 거기에 정자들을 만들어 다리를 놓고, 담장을 설치했던 별서원림이다.

양산보는 17세기 중종 때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 후 죽임을 당하자 실의에 빠져서 담양으로 낙향했다. 이후 그는 숨어 지내면서 담양의 시가 문학을 하는 문인들인 송순과 김인후, 정철 등과 교류하면서 소쇄원을 만들어갔다.

양산보는 주무숙(周茂叔)의 ‘애련설(愛蓮說)’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늘 가까이했다. 그는 또 주무숙의 인물평인 ‘비 갠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광풍(光風), ‘맑은 날의 달빛’이라는 뜻의 제월(霽月)을 따와 광풍각과 제월당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소쇄(瀟灑)’는 육조시대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으로 속세를 떠난 느낌이 있다

소쇄원의 옛 모습은 18세기 후반에 판각한 ‘소쇄원도’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김인후의 48영 시구도 함께 새겨져 있다.

고경명이 무등산을 유람하고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당시 소쇄원 모습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융합되고, 가장 한국적인 정원을 만들어서 꾸미되 꾸미지 않는 듯한, 자연미 넘치는 한국적 서정이 녹아 있다.

‘계류가 집의 동쪽으로부터 담장을 통하여 흘러 들어와서/ 그 위에는 자그마한 외나무다리/ 다리 아래쪽에 있는 돌 위에는 저절로 파인/ 조담(槽潭)/ 물이 아래로 쏟아지면서 작은 폭포/ 조담 위에는 노송/ 작은 폭포 서쪽에는 작은 집 한 채인 광풍각/ 그 남쪽에는 돌을 여러 층으로 높이 쌓아 만든 석가산/ 작은 정자/ 처마 바로 옆에 벽오동/ 정자 아래쪽에 작은 연못/ 홈을 판 통나무로 만든 비구(飛溝)로 계류를 끌어들이고/ 연못 서쪽에는 굵은 대숲/ 대숲 서쪽에 연못/ 돌로 만든 고랑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연못 북쪽에 물방아’

보길도의 세연정 원림
세연정 원림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은거지에서 만든 별서이며, 고산의 많은 가사문학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병자호란 때에 인조가 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산이 제주도 가던 길에 보길도에서 풍광 좋은 길지(吉地)를 만나 은거지로 삼았다.

세연정 연못은 고산 윤선도가 계간(溪澗)에 판석 제방을 막아 만들었다. 지금의 세연정 건물은 1991년 발굴 조사한 자료에 의해서 복원됐다.

세연정은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 원림(園林) 입구에 있다. 이곳의 물이 맑고 깨끗하여 못에 비치는 주변의 경관이 물에 씻은 듯 보는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기 때문에 이름을 ‘세연지’라고 했다. 고산은 이 못 주변에 세연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시설물을 설치하고 원림을 조성했다.

이곳은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자라기에 알맞은 온대 지역으로, 원래의 자연 수목과 잘 어울린 원림이다.

서석지
서석지는 조선 중기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의 별서(別墅)이며, 벼슬을 마다하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만든 원림이다. 작은 향원(鄕園)이지만 주위의 산천이 마을입구 석문(石門)과 별서연못원림에 포함되어 있다. 서석지가 있는 연당마을은 동래 정씨의 집성촌이다.

광해군이 즉위 후 실정을 거듭하므로 벼슬을 단념하고 낙남(落南), 이곳에서 학문 연구로 일생을 마쳤다. 정영방은 산천이 수려한 곳을 찾던 중 1600년경 서석지가 있는 이곳에 평생의 거처를 정하게 된다. 1610년에는 초당을 짓고 살기 시작하였다.

‘서석지(瑞石池)’라는 이름은 연못 속의 자연 암반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했다. 서석군은 주로 동쪽에 집중적으로 많고, 수면에 따라 그 기괴한 형상을 드러내거나 얕게 잠겨 있어 각기 그 특이한 형상에 따라 이름 붙인 희귀한 수석경(水石景)을 이루고 있다

서석지는 자연을 그대로 활용하는 한국 원림기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경정잡영 32절(敬亭雜詠三十二絶)」과 「임천잡영 16절(臨川雜詠十六絶)」 등의 기록에는 갈라진 돌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주변 경관에 의미를 부여했고, 원림을 만든 작정자(作庭者)의 세심함과 당시 은둔한 선비가 가진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소쇄원도, 소쇄원 목판화
소쇄원도, 소쇄원 목판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