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살아있는 화석
[기고] 살아있는 화석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7.12.19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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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동아시아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수한 자질 덕분에 인간들로부터 과분한 예찬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단 하나 가진 흠결 때문에 말 못할 고초도 겪고 있다. 나는 고생대부터 이 땅에 살아왔다. 공룡이 지구의 주인이던 중생대에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살아있는 화석(化石)’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주목(朱木)을 보고 흔히 ‘살아 천년, 죽어 천년’하며 장수를 상징하는 수목인양 말한다. 하지만 나와는 감히 비교될 수 없다. 가까이 용문사에만 가더라도 1,100년 넘게 살고 있는 나를 볼 수 있다. 긴 세월 숫한 전란과 번개, 산불 등을 이겨내며 묵묵히 버티고 있다. 내가 워낙 장수를 하다 보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중에는 내가 가장 많다. 또한 사람들은 나에게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얻을 수 있는 신목(神木)으로 믿으며 신성시 한다.

내 이름은 열매가 살구와 비슷하다 하여 살구 행(杏)자를 쓰고, 열매의 속 알맹이가 은빛같이 희다하여 은빛 은(銀)자를 조합하여 은행나무라 지었다. 또한 내 잎이 오리발을 닮았다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나는 풍모가 워낙 걸출하다 보니 문묘와 향교에도 많이 초대를 받고 있다. 그렇다보니 성균관에서는 유학의 상징으로 내 잎을 도안화하기도 했다. 가을이 되어 황금빛으로 물든 내 잎은 정말 환상적이다. 동심의 어린이들은 그 잎을 책갈피에 넣어 보관하기도 한다. 나의 꽃말은 장수, 정숙, 장엄이다.

나의 생명력은 참으로 강인하고 끈질기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폐허가 된 불모의 땅에 여러 수종의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오직 나 혼자 살아남았으며 지금도 6만 그루가 꿋꿋이 살고 있다. 그래서 나를 ‘희망의 담지자(Bearer of hope)’라 부르기도 한다. 인간이 도심의 참나무에 기생하는 애벌레를 조사했더니 무려 500종이 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 한 종의 애벌레만 연명하고 있었다. 이처럼 나는 척박한 토양과 가뭄에도 강하지만 병충해에는 더욱 강하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애정을 받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들에게 헌신적으로 기여한다. 우선 준수한 외형을 바탕으로 가로수나 정원수로 많이 진출하여 도시미관 향상과 공기정화에 일역을 담당한다. 60여 미터까지 자라는 훤칠한 내 몸체는 결이 좋고 치밀하여 목재로 각광을 받으며 각종 가구의 재료로 애용된다. 그리고 내 열매는 레시틴, 아스파라긴산 등 다양한 성분이 들어있어 면역력 향상 약재로 활용되며, 그 알맹이는 큰 제사상에 오를 정도로 귀한 과일인데 말랑말랑하고 쫀득하여 씹는 촉감도 일품이다. 내 잎 또한 고혈압과 혈액순환 개선에 탁월한 장코플라톤 성분이 많아 의약원료로 널리 쓰인다. 징코민은 그 대표적인 의약품 중 하나다. 뿌리는 백과근(白果根)이라 하여 관상동맥경화에 좋다고 하니 실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인간들은 나의 진가를 다 몰라주며 잔인하기까지 하다. 무슨 말이냐고? 나를 멋있다며 가로수로 무차별 심을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내 열매에서 냄새가 좀 난다하여 혐오하고 배척하니 말이다. 내 열매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는 씨앗의 외피에 함유된 ‘빌로볼’이라는 독성물질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냄새 덕에 동물이나 곤충으로부터 종자를 지킬 수 있다. 나로서는 종족보존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그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쩡하게 다 자란 나를 타 수종으로 교체하거나 암나무만 골라 베어내는 등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고 있다.

뿐만 아니다. 나는 30여년 자라야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보고 암수를 구분하던 인간이 요즘은 묘목의 DNA를 분석하여 아예 수나무만 골라 심고 있다. 저들은 태아감식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나에게는 그래도 된단 말인가? 만물은 음과 양으로 존재하듯이 생명체는 암수가 있어야 하거늘 신의 섭리를 벗어나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국립산림과학원에 의하면 2016년 한해 나의 암수를 구별하는 DNA분석 요청이 1,600건에 달하며, 이를 감당 못해 업무 중단사태가 벌어졌단다. 심지어 외국 일부도시에서는 나의 암나무에 ‘열매결실억제용 약제’까지 살포하고 있다. 이 정도면 나를 멸종이라도 시키겠다는 심사가 아닌가?

인간들은 나에 대한 고마움도 모르고 오로지 자기들 위주다. 구릿한 그 냄새는 저들도 갖고 있으면서 그토록 나만 혐오한다. 그나마 내가 고생대부터 지구를 지켜온 원주민이라 믿어주니 다행이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아닌가?

필자소개
​수필문학으로 등단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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