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산책] 색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달팽이 산책] 색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 현은순 북경한국국제학교병설유치원 원감
  • 승인 2018.01.03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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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갛게 화를 내는 아이가 있다. 그런 아이를 알고 있는가?

몰리 뱅의 ‘쏘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이란 그림책 속 쏘피가 그렇다. 쏘피는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감정이 폭발하여 새빨갛게 화를 내는 아이다. 몰리 뱅은 색상을 주제로 주인공의 행동과 성격을 시각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외곽선 색의 변화로 표현하고 있다. 색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를 알면 색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 그림책은 색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읽는 그림책이다.

쏘피는 고릴라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배경색은 노랑, 연두 빛의 따뜻하고 차분한 색이다.

“안 돼!” 쏘피는 언니에게 고릴라 인형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트럭에 걸려 넘어지면서 상처가 났다. 쏘피는 붉은 피가 머리끝까지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화치밀어 올랐다. 폭발할 것 같은 화가 반사되어 마룻바닥에 빨간 빛 줄무늬가 생겼다.

“쏘피는 지금처럼 화난 적이 없었습니다.” 쏘피는 심장이 빠르게 뛰며 피가 머리끝으로 몰리며 머리카락에 날이 서는 걸 느꼈다. 입술이 일그러지더니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잠시 입을 멈춘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빨갛게 일었다. 퍼져 나가기 전의 응축된 빨강이다.

“와지끈” 손에 힘이 들어가며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새빨간 빨간색처럼 소리를 질렀어요”라는 장면이 이어진다. 입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뿜어져나가고 새빨간 소리는 방안의 장난감들을 천장으로 날려버렸다. 장난감들은 와지끈 부서지고, 천장의 등이 흔들거린다. 빨간 문은 불안하고 보라색 벽은 위태롭다.

정말, 정말 화가 났을 때는, 왠지 작아진 듯 초라한 모습, 왼쪽 방문 입구에서부터 대각선으로 오른쪽 천장 끝까지 닿을 수 있는 만큼의 큰 소리의 ‘괴성’, 천장에 매달려 있던 전등이 흔들거리는 불안함, 장난감들이 ‘와지끈’ 부서져 날아가는 날카로움, 혀끝이 불에 타는 뜨거움, 엉망진창이 되어 아무렇게나 터져 나오는 억울함이 한꺼번에 튀어 나온다. 이런 경험을 해본 아이는 이 장면에서 오감이 동시에 꿈틀거릴 것이다.

“쏘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

‘부르르’ 몸을 떨며 막 폭발할 화산처럼 변한다. 쏘피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날카롭게 털을 세운 고양이도 달아나고 있다. 화산이 폭발하면 모든 것들이 재로 변해버릴 기세이다. 활활 태우는 뜨거운 빨강이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쏘피는 집 밖으로 튕겨나간다. 숲 속의 나무들이 바르르 몸을 떤다. 쏘피는 숲속으로 달리고 또 달린다. 나무들 사이에서 등을 기울이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한참 동안 울어버린다. 나무도, 고사리도, 들쥐도 쏘피가 기울인 등의 각도만큼 쏘피를 향해 몸을 기울여 준다. 쏘피와 나무는 같은 색이다. 눈물로 씻겨나간 분홍이다.

쏘피는 등을 곧게 펴고 ‘바라보기’를 한다. 흔들림 없이 단단한 바위를 바라보고, 돌봐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잘 자라고 있는 나무, 잎사귀를 만지면 손끝에서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고사리를 바라본다. 이윽고 맑은 소리로 즐겁게 지저귀는 새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본다. 내 안에서 나는 소리도 들어본다.

쏘피는 커다람 밤나무에 올라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몸을 한 밤나무를 꼭 껴안아 보았다. 쏘피는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을 느낀다. 날이 섰던 머리카락은 이미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와 있다.

차가운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면 몸의 열기가 사라지고 차가워진다. 차가운 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끓어오르던 피가 서서히 굳어진다. 마음도 차분해진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기,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기는 좁은 마음을 사라지게 한다. 빨간 마음을 바다에 씻는다. 밤나무 아래로 내려온다. 쏘피는 붉은 외곽선이 노란색으로 변했다.

“나 왔어요!” 집은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노란색은 따뜻하다. 따뜻한 노랑은 정감이 있어 좋다. 구수한 누룽지 냄새가 날 것 같은 집 분위기다.

색에 대한 정보는 그림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안으로 들어가 색이 주는 정보를 읽어야 한다. 정보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행위를 통해 기억으로 저장된다. 감각적 체험은 경험으로 축적된다. 그림책을 읽을 때는 색이 주는 이미지를 이미 축적된 ‘~한 적이 있는 경험’을 끌어 들인다.

“쏘피는 소리를 질렀어요. 새빨간 빨간색처럼 소리를 질렀어요”라는 장을 읽었다고 할 때, 그 장면을 ‘본’ 것과 ‘글자’를 읽은 것만으로 그림책 감상과 읽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동안 보았던 경험을 꺼내어 오감과 느낌을 버무려 상상해본다. 이 때 ‘느낌’의 뇌를 함께 작동시켜 주관적 해석의 매개체가 되게 한다. “너도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있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등등의 질문으로 경험과 느낌을 꺼내게 한다.

오감+느낌으로 여러 번 그림책을 읽다보면 ‘그림 밖’만이 아니라 ‘그림 안’을, ‘겉도는 색’보다는 ‘느낌이 있는 색’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림책의 색들이 독자들에게 속삭이듯 말을 걸어올 것이다. 오감+느낌으로 책읽기를 했을 때 비로소 그림책의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우리 유치원의 상이도 속상할 때마다 새빨갛게 소리를 지른다. 상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주변의 아이들은 울퉁불퉁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운다. 상이는 물건을 내던지고 땅바닥에 나뒹군다. 이 순간 교실 벽은 빨갛게 변한다. 상이가 빨갛게 새빨갛게 소리를 지르는 날 숨고르기를 하고 나면 이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다.

필자소개
북경한국국제학교병설유치원 원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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