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春秋] 녹비홍수(綠肥紅瘦)
[대륙春秋] 녹비홍수(綠肥紅瘦)
  •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 승인 2018.01.10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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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들은 지고 푸른 잎이 짙어진다.

봄기운이 무르익으면 새싹의 빛깔이 꽃보다 아름다운 때가 있다. 그렇지만 ‘낙엽이 꽃보다 아름답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등과 같이 특정 사태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비교의 대상으로 설정되는 것은 결국 꽃이다.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인식되고 있는 것은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만자천홍을 뽐내던 꽃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신록의 싱그러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바로 이즈음의 광경을 노래한 사(詞)가 있다.

昨夜雨疏風驟(작야우소풍취, 어젯밤 성긴 비에 바람 몰아쳤었지)
濃睡不消殘酒(농수불소잔주, 곤히 잠들었으나 술기운은 다 깨지 않았네)
試問捲簾人(시문권렴인, 발 걷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卻道海棠依舊(각도해당의구, 그래도 해당화는 여전하다네)
知否(지부, 아는가?)
知否(지부, 아는가?)
應是綠肥紅瘦(응시녹비홍수, 분명 푸른빛은 짙어졌고 꽃은 줄어들었을 것인데)

바로 중국 최고의 여류 사인(詞人)으로 손꼽히는 宋나라 사람 이청조(李淸照)가 지은 <여몽령(如夢令)>이라는 작품이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갈 무렵 어김없이 비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고운 자태를 뽐내느라 지쳐있는 꽃잎들은 힘없이 떨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꽃이 있던 자리는 신록이 차지한다. 신록의 때깔도 고와서 꽃보다 아름답다는 이들이 있지만, 그래도 꽃보다 아름답기야 하겠는가? 그래서 사인은 붉은 꽃이 떨어진 후 녹색이 짙어진 것을 보면서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갔다는 아쉬움에 서글퍼진다.

바로 ‘푸른빛은 짙어졌고 꽃은 줄어들었다’는 ‘綠肥紅瘦(녹비홍수)’ 넉 자가 그 아쉬움과 서글픔을 드러내고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계절의 변화를 매우 요령 있게 포착하고 있는 이 넉 자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마침내 성어가 되었다.

사(詞)는 중국 전통 시가의 일종이다. 중국의 시가 율시(律詩)로 정리되고, 율시의 복잡하고 엄격한 규율로 말미암아 율시가 사대부들의 전유물이 되었을 때, 민중이 새롭게 개척한 서정의 수단이 바로 이 사(詞)다.

당(唐)나라 시대에 생겨나 송(宋)나라 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이 사(詞)도 나중에는 사대부들이 독점하게 되지만, 그래도 시에 비하면 서민적 성격이 강해서 감정의 표현이 자유롭고 상대적으로 노골적이다. 율시가 한 구의 글자 수가 5자나 7자로 고정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이 작품처럼 한 구의 글자 수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 사(詞)의 형식적 특색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해당(海棠)’은 한국에서 ‘해당(海棠)’이라고 부르는 식물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 중국의 해당은 장미과 사과속의 식물이지만, 한국의 해당은 장미과 장미속에 속하는 식물이다. 중국의 해당은 소교목의 식물로서 꽃사과의 일종이고, 한국의 해당은 찔레꽃과 장미꽃의 중간쯤 가는 관목이다.

사(詞)라는 장르명을 보고서 시(詩)의 잘못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수 있고, 해당이 어떤 식물인지 궁금해 하거나 그 해당을 한국의 해당으로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어서 사족을 달았다.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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