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春秋] 청산일발(靑山一髮)
[대륙春秋] 청산일발(靑山一髮)
  •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 승인 2018.01.20 0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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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는 푸른 산의 윤곽이 단지 한 올의 머리카락 같다

20년 전 아내와 함께 했던 울릉도 여행이 지금까지도 소중한 추억으로 필자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도동에서 하선하자마자 나물 파는 할머니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가랑비를 맞으며 성인봉을 올라가 싱그러운 원시림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구름 속의 성인봉을 넘어갈 무렵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더럭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때 마침 근처를 지나던 경운기를 개조한 짐차를 얻어 타고 무사히 천부로 갔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울릉도를 작은 섬이라 얕보고 천부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하루 만에 도동까지 가려는 생각으로 길을 가다가 현포를 조금 지난 지점에서 초여름의 더위에 지쳐 거의 녹초가 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때에도 거리를 지나가던 트럭의 신세를 지고서 통구미까지 같던 일 등 치기 어린 젊은 날의 추억이 마치 엊그저께 일인 냥 생생하다.

포항으로 돌아오던 뱃전에서 바라보았던 광경도 잊을 수 없다. 한참을 달려도 검푸른 바닷물만 보이더니 어느 순간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머리카락 같은 검은 선 한 가닥이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청산일발(靑山一髮)’이 바로 그것이었다. ‘청산일발(靑山一髮)’이라는 말은 소동파(蘇東坡)의 시에서 나온 말이다.

餘生欲老海南村(여생욕로해남촌, 남은 생애를 해남도의 촌에서 늙으려고 했더니)
帝遣巫陽招我魂(제견무양초아혼,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나를 부르시네)
杳杳天低鶻沒處(묘묘천저골몰처, 아득히 멀어 나지막한 하늘에 새매가 떨어지는 곳)
靑山一髮是中原(청산일발시중원, 청산이 머리카락 한 올처럼 보이는 곳이 중원이구나)

이것은 소동파가 해남도(海南島)에서의 귀양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에 지은 시 <징매역통조각(澄邁驛通潮閣)>이라는 시 두 수 중 두 번째 작품이다.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나를 부르시네”라고 번역한 두 번째 구의 원문에서 ‘제(帝)’는 ‘천제(天帝)’고, ‘무양(巫陽)’은 무당이다.

초사(楚辭)의 <초혼(招魂)>에 ‘천제가 무당인 무양(巫陽)을 시켜 혼을 부르게 했다’는 내용을 원용하여 ‘황제가 사신을 보내 자신을 귀양지에서 불러들이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시에 들어 있는 ‘청산일발(靑山一髮)’ 넉 자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가 마치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것을 그대로 묘사한 것인데, 이것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성어(成語)가 됐다.

너무나 당연한 현상을 묘사한 것이라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일반적인 성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이것을 성어로 간주하지 않는 이도 있는 듯하지만, ‘먼 바다에서 바라보이는 육지의 모습’이라든지, ‘중원(中原)’을 상징하는 성어로 보아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소동파가 당시에 바라보았던 육지가 본래 남만(南蠻)으로 치부되던 광동성(廣東省)의 한 부분이기에 전통적인 의미의 중원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임을 감안할 때 그 ‘중원’은 요즈음의 ‘중국’과 같은 의미로 보면 될 것이다.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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