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산책] 벽화마을에 눈이 내리다
[달팽이 산책] 벽화마을에 눈이 내리다
  • 현은순 북경한국국제학교병설유치원 원감
  • 승인 2018.02.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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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성산읍 신천리에 최근에 그려진 벽화마을이 있다. 어제는 처음으로 이 벽화마을을 여행했다. 한낮이라 눈이 많이 녹아있었다. 밤사이 눈이 많이 쌓였다.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마을이 흩트려지기 전의 벽화 풍경을 보고 싶어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같은 자리 같은 풍경도 계절이나 날씨, 시간 등에 따라 달리 보인다. 벽화도 마찬가지이다. 시야를 가릴 만큼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벽화이야기는 분명 달리 읽혀질 것이다. 이 마을은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 많아 ‘바람 코지’라 불린다. ‘코지’는 ‘곶’을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이 더욱 거칠어졌다. 생채기 없는 깨끗한 거리 그대로였다.

마을의 집 구조는 대부분 ‘ㄷ’자이거나 ‘ㄱ’자 형의 단층집이다. 가운데 가정집을 중심으로 왼쪽이나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다. 바닷가에 인접해 있고 중산간 지역에 밭을 소유하고 있는 반농 반어촌 마을이다. 때문에 창고는 반드시 필요하다.

마당 한 구석에는 외부용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은 집에서 멀수록 좋다는 옛 어른들의 생각에서이기도 하지만 경조사를 집에서 치르는 풍습으로 인해 바깥에 화장실을 마련해 놓는다. 이 마을 지붕의 형태는 거의 슬레이트이거나 슬라브이며 외관은 시멘트벽이다.

시멘트벽은 벽화를 그리기는 데 좋은 몫을 했다. 100여점의 벽화는 길가에 인접한 집의 외벽이나 집집마다의 창고와 화장실 벽에 그려져 있다. 그림의 종류도 다양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곰돌이 푸우,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와 친구들, 겨울왕국, 짱구, 개구리 왕눈이 캐릭터들이 있다.

동물들도 보인다.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오는 코끼리, 한 입 꺼리도 안 되는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긴 혀를 내밀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위협하며 이리저리 날뛰는 호랑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이 그림 앞에서는 아이들이 한바탕 배를 잡고 웃을 것 같다.

함박눈이 더욱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복소복한 눈길 위로 내가 첫발자국을 낼 때마다 뽀옥 뽀옥 소리가 난다. 이 소리에 놀란 개들이 엇박자로 컹컹 짓는다. 오늘 같이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은 벽화의 그림이 평소와는 다르게 읽힌다. 눈이 내리는 풍경과 벽화가 어우러져 작품의 이야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커다란 창고에 그려진 기린 트릭아트가 눈에 띈다. 기린은 푸른 초원을 뒤로 하고 담장 밖으로 긴 목을 내밀고 있다. 풀 대신 하얗게 쌓인 눈이라도 먹으려는 것일까? 창고 옆 무밭에서 얼른 무를 한 움큼 뽑아다 눈을 툭툭 털어내고 기린에게 먹여 주며 긴 목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길가 쪽에 있는 밀감 저장창고에는 깨어진 공룡 알과 이제 막 갈라지고 있는 공룡 알이 보인다. ‘ㄱ’자로 꺾인 오른쪽 화장실에는 벽을 부수고 나오려는 공룡이 있다. 오늘 같이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아기 공룡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공룡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바다 풍경을 그린 벽화들이 보인다. 옛 항구의 모습. 바다 위 고깃배들, 바다 속에서 문어, 소라, 전복을 잡고 있는 해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벽화에 바다가 그대로 옮겨 앉았다. 예로부터 바다목장이 형성될 정도로 해산물이 풍부해 해녀가 많았던 마을이다.

집 마당에 환하게 웃으며 엄지척하고 물질 나가는 해녀 그림이 있다. 모서리를 마주한 벽에는 해녀가 문어를 손에 들고 “문어다. 문어를 잡았다” 소리치고 있다. 태왁(몸을 뜨게 하는 뒤웅박)에 몸을 의지한 채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호이 호이 호이’ 숨비소리다. 푸른 바다가 시리다. 해녀가 집을 나설 때 엄지척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보다. 오랜 세월동안 물질을 하며 살아온 이력서가 파도처럼 겹겹이 이마에 새겨져 있다.

아마 초등학교 4,5학년 때쯤인 것 같다. 우리 마을 바다에서 문어를 잡은 적이 있다. 문어는 썰물 때 파도 따라 미처 바다로 가지 못해 작은 구멍에 갇혀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문어를 잡는 순간이었다. 설렘과 흥분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은 집념으로 손이 긴장됐다.

덥석 문어를 잡자마자 문어는 내 손과 팔의 피를 다 빨아 먹어 버릴 듯이 1200개의 빨판을 조여 왔다. 내가 문어를 잡고 놓지 않으려는 건지 문어가 나를 잡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지자 두려움이 일었다.

“문어다. 문어를 잡았다.”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달려왔다. 문어를 잡았다는 기쁨보다 무서움에서 해방된 안도감이 더 컸었다. 오래된 추억이다. 오늘 벽화 앞에서 추억 하나를 건져 올렸다.

눈발이 다시 거세어 졌다. 물질작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해녀 세 사람의 등짐들이 무겁다. 풍족한 수확이다. 거친 눈발이 벽화에 오버랩 되면서 덧칠한 그림이 되었다. 해녀들의 모습이 더욱 고달파 보인다. 여름에 이 그림을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고정된 미술관의 그림과 달리 바깥 날씨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벽화의 매력이다.

담장의 올라선 강아지가 뼈다귀 대신 담장에 쌓인 눈을 먹으려는 듯이 보이며 옆에 서 있던 아이가 ‘헐...’이라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바뀌어 보인다. 강아지와 여자아이가 하나의 방패연에 나란히 올라타고 날아가는 그림이 있다.

날 좋은 날에는 푸른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오를지 모른다. 오늘 같이 밤사이 소복이 눈 내린 아침에는 눈만 봐도 신이 나는 강아지와 함께 새하얗게 눈 덮인 마을을 한 바퀴 휙 돌아볼 것 같다. 나도 함께 이 연을 타고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보고 싶어진다.

마을을 돌다보면 어른들의 추억꺼리가 있는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도시락을 교실 난로 위에 올려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그림이 보인다. 학생시절 점심시간은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도시락 반찬을 자랑삼아 꺼내놓는 학생의 얼굴이 환하다. 계란 반찬이 귀했던 시절 이야기이다. 이 시기에는 찐빵가게에서 미팅을 하곤 했다. 다른 집 담벼락에 남녀 학생들이 호빵을 가운데 시켜놓고 쌍쌍이 미팅하는 모습이 정겹다. 컨테이너가 쌓여있는 밀감창고 벽에는 동네어른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다. 한가한 농한기에 친목을 다지기는 유일한 놀이이다. 지금도 이 주변 마을에서는 경조사 때는 온종일 윷놀이를 하며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서로 도와주는 풍습이 남아있다.

2013년 여름, 영화감독 박진순은 ‘선샤인(Sunshine)’ 주인공 화가가 성장하는 탈북소녀 이야기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한 달 남짓한 촬영기간 동안 팝아트풍의 벽화 9점을 남겼는데 이것이 벽화마을 ‘바람코지’로 변화하는 단초가 됐다고 한다. 2016년부터 제주특별자치도 지원 아래 다양한 주제로 그리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그려진 벽화는 100여점 정도이다. 벽화마을로 변화하는 데는 20여명의 젊은 예술가들의 공이 컸다.

이 곳 벽화는 작품성이 뛰어나 미술관 못지않은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집 앞에 세워진 차들로 인해 몇 군데 벽화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림 앞 쓰레기 더미가 있고 벽면 사이에 컨테이너가 있어 작품성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점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을 주민들의 예술에 대한 이해와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다.

화가 우씨는 마을의 특징인 바다와 해녀를 주제로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예술가들이 있어 ‘바람코지’ 마을에는 예술의 바람이 연중 불 것이라는 예보이다. 반가운 일기예보가 아닐 수 없다. 한 때의 유행처럼 일회성 예술이 아니라 매년 찾아가보고 싶은 변화하는 예술 마을로 거듭나면 좋겠다.

필자소개
북경한국국제학교병설유치원 원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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