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산책] 동백꽃 바라보기
[달팽이 산책] 동백꽃 바라보기
  • 현은순 북경한국국제학교병설유치원 원감
  • 승인 2018.02.27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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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만발하게 피는 꽃은 그리 많지 않다. 눈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는 고혹한 자태 때문일까? 어릴 적 동백꽃에 얽힌 추억 때문일까? 겨울이면 동백꽃이 그립다.

간밤에 내린 눈 때문일까? 동백꽃이 보고 싶었다. 빨갛게 피어난 동백꽃이 자꾸만 아른거려 견딜 수 없었다. 검지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제주 토종 동백꽃을 실컷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무턱대고 물었다. 위미리 세천동(제주도 서귀포시) 바닷가 마을에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다고 했다. 동백꽃, 빨간 동백꽃. 혹시 져버렸으면 어쩌나. 혼잣말을 하며 서둘러 차를 몰고 갔다.

동백꽃을 보러 온 이들이 많았다. 동백나무는 과수원 둘레에 쌓아놓은 돌담을 따라 한 줄로 서있다. 이 과수원은 현병춘(1858~1933) 할머니가 17세에 이 마을로 시집와서 해초캐기와 품팔이를 하여 황무지 밭을 일군 것이라 한다. 거친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 동백을 따다 씨앗을 뿌려 방풍나무로 키우며 한 인생을 다 보냈다. 할머니는 꽃 같은 삶을 살기보다 손발이 갈라지도록 가족을 위해 바닷바람 막아낸 억샌 인생을 살았다.

꽃을 바라보기 위해 오랜 시간을 낸 적이 있는가? 꽃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가슴 한 구석의 신경을 건드려 감흥이 일 때까지 충분히.

동백꽃은 한 가지에 다닥다닥 봉우리를 맺어 차례대로 핀다. 핀 꽃이 목숨을 다하여 떨어지면 옆에 것이 피고 또 지고를 반복한다. 마술 사탕부케 같은 꽃이다. 동백나무를 보러 온 사람들은 동백꽃을 언뜻언뜻 보며 “꽃 예쁘다”라는 말을 툭 내뱉고 쓰윽 지나가버린다. 동백꽃은 멀리서보면 어디가 예쁜지 잘 모른다. 꽃 가까이에서 차근차근 뜯어봐야 곱게 단장한 새색시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하룻밤을 불태우다 검푸른 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으리라 유혹하는 듯 꽃의 자태가 화려하다.

봉우리일 때는 갸름한 얼굴로 속내를 단단하게 감춘다. 겨울바람 사이로 햇살들이 들락거리며 다독여주면 겹겹이 감춰두었던 붉은 입술을 도도하게 조금씩 벌린다. 그러다 동박새 울음소리가 유난히 귀에 감기는 날 저도 모르게 빨간 입술을 확 벌려 고혹한 자태를 들어낸다. 청사초롱 불 밝히는 빨간 한복치마 같기도 한 동백꽃.

꽃 속에 한 백 개의 하얀 빗살을 가지런히 원통형으로 이은 수술이 있다. 맵시 있는 왕관모양이다. 수술 끝마다 노란 금가루를 잔뜩 묻혀놓았다가 어느 새벽 불쑥 새가 녹두빛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면 아낌없이 샤방샤방 뿌려질 것이다. 진한 초록 잎이 빨갛게 달아오른 꽃잎을 받쳐주어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런 모습을 한 번 눈 홀려 본이는 아른아른 떠올라 절대 잊을 수 없다. 동백은 유혹의 명수다.

동백나무를 둘레를 돌며 내 곁을 지나가려던 아가씨가 동백꽃에 넋이 팔린 나를 쳐다보다 멀쩡한 길에서 넘어졌다. “쿵!” 그제야 동백꽃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네”
“동백꽃 이쁘죠?”
“(배시시 웃는다.)"

새하얗게 눈이 내려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지워진다 해도 어릴 적 추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릴 적에는 제주 마을 어디에서나 동백꽃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동백나무에 얽힌 이야기꽃이 마당 언저리에서 피고 지고했다. 우리 집 돌담 모퉁이에 피었던 동백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달달함이 농후했던 중독성 있는 꽃이었다.

동백꽃은 겨울에 귀한 꿀을 낸다. 꿀이 많아 어릴 때는 동백꽃을 따서 먹기도 했다. 단 것이 늘 부족했던 어린 아이들에게 어찌 이 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빨갛게 동백꽃이 피면 아이들은 나발 모양의 꽃을 입에 대고 달달한 꿀을 빨아먹었다. 콧등에 황금색 꽃가루를 묻히고 뚝 떨어져버릴 것 같은 새빨간 꽃을 쪽쪽 빨고 있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펑정지에(2012년 제주예술인마을 입주한 중국작가)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같이 꽃을 꽉 깨문 입술이 유혹적이지 않겠는가? 어릴 때 먹은 동백꽃 꿀은 독약이었음에 틀림없다. 겨울마다 중독이 살아나 미친 사람처럼 산으로 바다로 동백꽃을 찾아다니게 만든다. 이 겨울에도.

동백꽃은 수정할 때 곤충이 부족해서 꽃술을 새에게 맡기는 조매화(鳥媒花)라고 한다. 조매화 역할을 하는 것은 주로 동박새이다. 동박새도 아이들처럼 동백꽃의 꿀을 가장 좋아한다. 추운 겨울바람을 이기려면 단 꿀이 필요하겠지. 동박새는 어린 아이 손바닥 크기만 하다. 가슴이 작아서인지 내뱉다 말듯이 아주 짧은 소리로 운다. 아이들은 동백꽃을 사랑한 만큼 동박새를 좋아했다. 누구나 동박새 소리만큼은 구별할 줄 알았다. 할머니는 님 그리워 동박 동박 운다고 말했다.

한 입 거리밖에 안 되는 이 동박새를 동네 오빠들은 기어이 잡아먹겠다며 시시때때로 새총을 쏘아댔다. 노란연두빛 털이 부드럽고 귀여운 동박새. 동박새가 붉은 동백꽃들 사이에서 뚝 떨어진다. 동박새의 죽음은 송이채 죽음을 맞이하는 동백꽃 모습과 닮았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너무나 잔인한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다. 잊히지 않는 잔인한 추억이다.

화려하고 달달한 동백꽃이 활짝 피어있는 날은 고작 이삼일. 이런 단명의 운명을 타고난 꽃이 또 있을까? 불행한 꽃은 바람이 지나가는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온 몸으로 낙화한다. 왜 이리 빨리 가시나? 살아있는 날이 너무 짧아 더욱 슬프다. 이런 이유로 제주에서는 붉은 피로 멍든 채 한순간에 져버린 4.3의 영혼들을 동백꽃에 비유한다. 제주 마을 곳곳에는 동백꽃의 운명을 닮은 4.3(1948. 4.3 제주 무장봉기 사건)의 유령들이 있다. 제주 동백꽃은 아픈 역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겨울 내내 피었다가 봄을 열어주고 가는 동백꽃. 하얀 수술대는 순백의 매화꽃으로 환생하고, 노란 수술가루 혼백은 성산포 광치기 해변으로 날아가 유채꽃 위에 앉아 봄을 불러내겠지. 어이 어이 어이!

필자소개
북경한국국제학교병설유치원 원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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