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을 보니, 삼성(三性)의 귀족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賢王)있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祭天)이 마한과 같고, 무기일(戊己日)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으며, 왕공(王公)을 한(汗)이라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臣智)의 지(智)와 한지(旱支)의 지(支)와 같으며, 후(后)를 알씨(閼氏)라 함이 곧 ‘아씨’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겼다.…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년 전에는 한방 안의 형제였다는 의안(疑案)을 가져 그 해결을 구하다가, 그 뒤에 건륭제(乾隆帝)가 명하여 지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와 요(遼)· 금(金)· 원(元)세 역사의 국어해(國語解)를 가지고 비교하여 보았더니…”
단재 신채호선생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조선상고사는 단군조선부터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까지를 다룬 신채호 선생의 저술이다. 이 책에서 그는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과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만주영토설, 삼국문화 일본유입설, 발해·신라 남북조론 등을 설파하면서 기존의 왕조 중심사를 비판하고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 왜곡을 통렬히 논박했다.
이 책을 저술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중국 베이징이다. 신채호 선생은 1915년에서 1928년까지 일시 상하이에서 거주한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북경에 머물면서 저술과 언론, 독립운동에 힘썼다. ‘조선상고사’ 원고의 대부분도 북경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재 신채호선생의 북경생활을 탐방하는 ‘북경 단재루트 투어’가 3월1일 북경한국인회와 보보여행사 공동주최로 개최돼, 이 행사에 동행했다. 날씨도 춥고 도보 이동이 많아 약간 힘들었으나 3.1절에 북경 교민들과 함께 항일독립운동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뜻깊은 경험이었다.
특히 단재 신채호선생의 족적을 따라가는 단재루트 탐방은 이번이 처음으로, 보보여행사 정원순대표가 민족의식 학습의 장으로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만들 것을 염두에 두고 북경한국인회와 함께 진행한 행사였다.
일행은 모두 80여명. 아침 일찍 집합해 버스로 이동한 끝에 오전 10시 못 미쳐 신채호선생이 신혼생활을 한 진스팡제(錦什坊街) 21호 건물을 찾았다. 신채호선생이 1920년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15세 연하의 박자혜 여사와 결혼해 단란한 생활을 꿈꾸던 때였다.
집은 전통가옥이 밀집한 북경 도심의 한 골목이었다. 하지만 인근 병원이 최근 증축하기로 결정이 나면서 이 지역에 있는 건물들이 곧 철거된다. 단재가 1923년 상해서 북경으로 돌아와 터를 잡았던 석등암 암자도 사라진지 오래여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재의 유적지였는데, 이마저 사라지게 돼 아쉬움이 더했다.
이어 석등암 유적지를 찾았다. 단재는 이곳에도 일시 머물면서 조선 고대사 연구를 계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단재는 1924년에는 출가해 북경 관음사에서도 6개월간 승려생활을 했다. 이곳의 관음사는 없어지고 지금은 중국 정부통신사인 신화통신이 들어서 있다. 일행은 이곳을 찾으며, 신채호선생의 유랑생활의 고뇌를 되씹었다.
이어 부인 박자혜 여사가 근무했던 협화병원도 찾았다. 박자혜 여사는 간호사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석방된 후 우당 이회영 선생 부인인 이은숙 여사의 중매로 15살 연상인 당시 40세의 신채호선생과 결혼을 했다.
점심 무렵에는 신채호선생이 가입해 활동했던 의열단 본부 유적지인 외교가 59호 건물도 찾았다. 이어 고려기독교청년회 본부 유적지, 신채호선생이 알고 지냈던 채원배 북경대학 총장의 근무처였던 북경대 도서관도 방문했다.
이어 단재의 장남이 출생하고 중문잡지 천고를 발행해 한중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차오또우후통과 우당 이회영 선생이 살았던 마오얼후통 29호도 방문했다. 이회영선생의 이 집은 북경을 거쳐 가는 많은 독립투사들이 즐겨 묵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투어는 오후 2시에 마무리됐다. 빠르게 둘러보았으나 감회는 깊었다. 북경을 찾거나 북경에서 자라는 우리 차세대들이 즐겨 찾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지사들을 떠올려보는 여행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