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엿기름과 고두밥을 삭히며
[Essay Garden] 엿기름과 고두밥을 삭히며
  • 최미자 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8.03.0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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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쌀쌀하더니 얼마 전에는 우박 비까지 잠시 내렸다. 샌디에이고는 올해엔 영하의 날씨는 아니지만 아침과 저녁으로 겨울기분이 든다. 이럴 때면 하얀 물위에 밥알이 둥둥 뜬 식혜가 생각난다. 먹고 싶어 엿기름을 정수 물에 풀고 5분(50%)도 현미로 고두밥을 지어 전기오븐에 넣고 삭히는 동안 나는 지난날 여러분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피어나 미소를 짓는다.

경상도는 단술, 서울 사람들은 감주라고 부르는 식혜를 고향 광주에서 나는 어릴 적 외갓집의 제삿날이나 설에 먹던 고급 후식이었다. 광산동 외삼촌댁의 넓은 이층 부엌에서 친척 외숙모님들이 모여 제사음식을 만들며 제주 방언으로 고주알미주알 집안 이야기들을 나누시던 신나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지가지 양념으로 다진 소고기 산적이랑 여러 가지 나물과 전을 맛있게 먹던 때를 생각하면 나의 입가엔 군침이 돈다. 요즘처럼 잘 먹던 시절이 아니라서 한 두어 달에 한번은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나는 옛날 그 어린 시절이 좋아 한국이나 미국에 살면서도 친척이 우리 집에 모일 때마다 한동안 그렇게 음식하고 대접하는 걸 좋아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맞벌이와 핵가족으로 한국에서는 명절음식도 전문 업체에 주문하는 안타까운 시대가 되어 조금 서글프다.

봉지 속 엿기름을 볼 때마다 오래전 공군 사택에서 보리 싹을 손수 길러 엿기름을 만들던 여고선배가 생각난다. 학창시절 공부는 물론 두 딸도 잘 키웠고 집안 살림도 완벽하던 선배는 내조도 잘하여 결국 남편의 어깨에 별까지 달았으니 대단한 여인이었다. 1960-70년대 여자는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결혼하면 아이를 키우느라 모두 솟 뚜껑 운전수라며 무시당할 때였다.

또 서울에 살 때 나는 우연히 이웃에 사는 나이든 소박한 아주머니로부터 감주 만드는 법을 배웠다. 홍 아주머니 내외분은 지금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다정한 목소리와 얼굴이 눈에 선하다. 당시 따끈따끈한 온돌방의 이불 속에서 오래 삭혀 끓였지만, 뽀얀 흰색 내기가 어려웠다. 모든 음식 맛이 그러하듯 식혜도 원료가 참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난 한국 상품을 파는 마켓의 선반에 서서 나와 가족이 먹을 음식처럼 양심과 정성으로 만든 회사의 엿기름 분말가루를 찾느라 한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엿기름을 물에 가라앉히고 현미를 오독오독 깨끗하게 문질러 씻어내는 일도 중요하다. 현미는 농약 성분이 많기 때문이다. 전기밥솥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나는 큰 전기 오븐 속에 넣고 조금 많이 만드는 편이다. 기다리는 6시간 동안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다 늦은 밤이 되기도 한다. 식혜의 예쁜 주인공인 밥알이 둥둥 뜨기까지의 과정이 참 힘들어 여러 번의 실패로 한동안 만들어 먹지 않던 식혜였다. 드디어 오랜 시간과 연구 끝에 올겨울엔 내가 식혜 만들기에 여러 번 성공했다.

삭힌 후 끓이면서 거품을 한참 거두는 과정도 다리 아프지만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견디어 낸다. 아, 그 때 부옇게 피어나는 김이 나의 코끝에 다가오는 은은한 식혜향기를 어떻게 표현할까. 엿기름 속의 아밀라아제 효소와 고두밥의 전분이 어울려 우리 몸속의 장을 편안하게 한다니 한국의 고유음식을 만들며 나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움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엿기름을 만들 때 보리 싹이 길어도 맛이 없으니 적당하게 길어내는 것도 기술이란다. 여러 날을 콩나물처럼 시루에 안치고 꺼내 씻어내고 또 다시 물을 부어가며 정성으로 만드는 엿기름(맥아). 또 자라며 엉킨 보리뿌리와 싹을 갈라내는 작업을 거쳐 말린 후에 거칠거나 하얀 분말로 우리 손에 들어온다.

이런 과정을 나는 직접 하지 않아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색깔도 고운 하얀 식혜는 말토스와 글루코오스라는 소화효소가 있어 서양의 요구르트가 부럽지 않다. 우리가족은 설탕을 넣지 않고 차거나 따뜻하게 데워 향기와 담백한 맛을 즐긴다. 싸늘한 날씨아래 식혜 속에 피어나는 나의 옛 추억 이야기로 남편과 딸이 귀를 기울이며 흠뻑 젖어 있는데, 지난번 나누어 먹은 지인들로부터 맛있다는 전화까지 오니 흐뭇한 저녁이었다.

필자소개
미국 샌디에고 30년 거주 수필가
저서 세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꽃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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