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완행열차
[이영승의 붓을 따라] 완행열차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8.04.04 0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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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 온 우리 아파트 앞으로 경춘선 열차가 지나다닌다. 거리가 삼백여 미터나 떨어져 소음의 불편은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 열차를 지대가 높은 아파트 12층 베란다에서 어쩌다 보게 되노라면 낭만을 느끼기도 한다. 

나이 탓인가? 불현듯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최대로 느린 완행열차였으면 더욱 좋겠다. 열차처럼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세월이 너무 아쉽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의미를 알 듯도 하다. 창밖을 바라보는 아내의 모습에서 무료함이 느껴진다.
 
잠시 고개를 돌리는 아내에게 “춘천행 청춘열차를 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소양강댐 주변을 둘러보고 춘천 닭갈비와 막국수를 먹으러가자고 했다. 의외의 제안에 반갑고 놀라운 듯 쳐다보며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한다. 

실은 내가 완행열차를 타보고 싶어 같이 가자고 한 것인데 자기를 위한 선심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저렇게 좋아하다니... 하기야 39년을 함께 살면서 오붓한 나들이 한번 같이 간 기억이 없으니 오죽 반가우랴! 아내를 위한 이벤트인양 시치미를 떼며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20여년 전만해도 새마을호는 정말 빠른 기차였다. 요금도 워낙 비싸 아무나 탈 수가 없었다. 나도 안동에서 서울을 수없이 오르내렸지만 새마을호는 그저 바라만볼 뿐 엄두도 내지 못하고 특급열차로 만족했다. 특급열차는 다섯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것도 연착이 되지 않을 경우이다. 

그러던 것이 2004년부터 경부선에 KTX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안동보다 두 배나 먼 거리인 부산을 2시간 남짓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춘천행 열차는 청량리역에서만 출발하는 줄 알았는데 상봉역에서도 승차가 되었다. 완행과 급행 두 종류가 있는데 춘천까지 한 시간 십분 걸리는 완행표를 샀다. 열차는 총 여섯 량인데 그중 두 량은 2층 열차였다. 

운치도 있고 경관을 보기도 좋을 것 같아 2층에 탔다. 춘천까지 요금은 8,200원으로 생각보다 저렴하였다. 좌석에 앉으니 왠지 가슴이 설렌다. 열차가 출발하자 아내도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창밖을 보니 저 멀리 초등학교 진입로의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린다. 마치 우리를 맞이하며 춤을 추는 듯하다. 아득한 어린 시절 청량한 가을 햇살에 만국기가 펄럭이던 운동회가 연상된다. 잠깐 고개를 돌리니 맞은편에 앉은 두 젊은 연인이 컵라면 하나에 이마를 맞대고 같이 먹고 있다. 얼마나 맛이 있어 하는지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옛날 중앙선 밤차를 타고 시골로 내려갈 때 어느 간이역에서 가락국수를 사먹던 기억이 문뜩 난다. 몇 젓가락도 되지 않던 그 국수는 정말로 꿀맛이었다. 상념에 젖어들고 있는데 벌써 춘천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춘천은 호반의 도시다. 의암 댐과 춘천 댐 그리고 소양강 댐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경관을 이룬다. 그 중 73년도에 준공된 소양강 댐은 123m의 높이 에 저수량이 무려 29억 톤이나 되는 대규모 댐이다. 북한강 수계의 춘천, 의암, 청평, 팔당 4개 댐을 합한 것보다도 3배가 넘는다. 

20만kw 발전기로 연간 3억 5천만kwh의 전력생산을 할뿐만 아니라 수도권의 용수 공급과 홍수 조절에도 크게 기여하는 다목적 댐이다. 오늘 날 서울이 한강의 홍수로부터 안전한 것도 소양강 댐 덕분이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양강 처녀’의 노래 소리가 한결 새롭게 들린다. 

춘천에 사는 문인들을 만나면 늘 호반의 도시를 자랑했는데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곳이 있어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춘천에서 이름난 닭갈비와 막국수 집이란다.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하며 정신없이 걷다보니 시장한 것조차 잊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어 순서를 기다려 자리를 배정받았다. 소문난 집이라니 더욱 맛이 있는 것 같다. 막걸리까지 한잔 걸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사는 게 별거더냐’라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인생은 65세부터 10년간이 황금시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막 황금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전 현직에서 은퇴하면서 마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양 힘들어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백수(白手)보다 더 좋은 팔자는 없다는 말이 오늘은 실감이 간다. 

‘오늘’이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며 또한 어제 떠난 어떤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 아니던가. ‘잘 산다’는 것은 결국 이 오늘을 소중히 여겨 감사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더도 말고 항상 오늘 하루만 같았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얼마 만에 타보는 ‘완행열차’이던가! 석양 아래 북한강을 따라 S자로 굽어 도는 열차가 마치 뱀이 꼬리를 치는 듯하다. 내 인생도 이 열차처럼 완행으로 흘렀으면 좋겠다. 

필자소개
​수필문학으로 등단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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