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春秋] 산외청산루외루(山外靑山樓外樓)
[대륙春秋] 산외청산루외루(山外靑山樓外樓)
  •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 승인 2018.04.10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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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경지가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송(宋)나라는 전대 당(唐)나라가 군벌들의 발호 때문에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고 급기야 망국으로 귀결되었던 것을 귀감으로 삼아 철저하게 숭문억무(崇文抑武)의 문치정책을 폈다. 그 결과 송나라는 서구의 르네상스 시대를 방불케 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지만, 상대적으로 약화된 국방력은 발호하는 북방민족을 억제하기에 역부족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송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금나라로 잡혀가는 정강지변(靖康之變)이라는 수모를 겪은 다음 중원 천지도 북방 민족에게 내어주고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역사상의 남송(南宋)이라는 왕조는 그렇게 생겨났다.

중국에서 양자강 일대는 고래로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이름이 높다. 따뜻한 기후에 아름다운 풍광이 돋보이는 자연이 있고, 물산도 풍부하다. 게다가 미인까지 많이 배출된다고 하여 역대로 중국인들이 선망하는 지역이며 문인묵객들의 꿈의 고장으로 입에 오르내린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항’이라고 하는 말은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로 대표되는 중국의 양자강 일대의 그러한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속담이다.

송나라 황실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 굴욕의 천도를 한 곳이 바로 그 항주(杭州)인데, 당시에는 주로 임안(臨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원래 문치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송나라 황실이 자신들의 기질에 더욱 잘 부합되는 임안에 도읍을 정하자, 영토의 반을 잃은 상실감과 패배의 치욕은 금세 잊어버리고 눈앞의 편안함에 안주하게 된다.

북방 민족이 호시탐탐 정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위기일발의 현실에는 굳이 눈을 감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향락의 탐닉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남송 사람들의 그런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행태를 보고 분개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썼다. 임승(林升)이라는 시인이 쓴 것으로 ‘임안의 저택에 씀’이라는 뜻의 <제임안저(題臨安邸)>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山外靑山樓外樓(산외청산루외루, 산 밖에 또 푸른 산이요 누락 밖에 또 누각인데)
西湖歌舞幾時休(서호가무기시휴, 서호의 노래와 춤은 언제나 끝나려나?)
春風薰得遊人醉(춘풍훈득유인취, 봄바람 따뜻하니 노는 사람들은 취해 있고)
直把杭州作汴州(직파항주작변주, 항주를 바로 변주처럼 만들었네)

서호(西湖)는 잘 알려진 대로 중국에서 손꼽히는 경승지다. 따뜻한 봄바람마저 불고 있는 이 경치 좋은 곳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 누가 즐겁지 않으리.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한 폭의 그림이 저절로 그려진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거기서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좀 더 폭을 넓히면 당시 남송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임시로 도읍을 정한 항주를 쫓겨나기 전의 도읍이었던 변주(汴州), 즉 개봉(開封)처럼 만들어놨다는 표현이다.

지금 항주에서 이렇게 노는 것은 북송 시절부터 하던 버릇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폼 나게 놀 수 있는 부류들은 당시의 지배층일 것임이 불문가지이므로, 이 말 속에는 지배층들이 전날의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고 그 버릇 그대로 취생몽사하고 있다는 강력한 풍자와 비판이 들어 있다.

그렇게 보면 ‘서호의 노래와 춤은 언제나 끝나려나’고 한 두 번째 구절 ‘西湖歌舞幾時休(서호가무기시휴)’에는 ‘옛날에도 지배층들이 향락에 빠져 국방과 민생을 돌보지 않아 나라를 반이나 빼앗기더니, 아직도 여전한 행태를 보이는 것을 보니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 버릇을 고치겠구나’라고 통렬하게 비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시인이 깨어 있는 정신으로 쓴 이 시는 이처럼 강렬한 시대적 의의를 담고 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해졌고, 그러는 동안에 이 시에서 성어가 하나 생겨났다. 첫 구절 ‘山外靑山樓外樓(산외청산루외루)’가 그대로거나 축약한 ‘山外靑山(산외청산)’으로써 독특한 의미를 나타내는 성어가 된 것이다.

항주의 아름다운 경관을 간결하게 묘사한 이 구를 사용한 성어의 의미는 이 시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 구가 성어로 쓰일 때에는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본래의 의미와 상당한 거리가 생긴다.

‘한 경지 너머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우리 말 속담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시가 유명해서 널리 알려지면서 그 속에 가장 보편적 의미로 읽혀질 수 있는 한 구가 본래의 문맥과는 다른 어떤 사정을 나타내는 성어로 변용된 것이다.

시대적 의미를 배제하고 보면 이 시는 단순히 ‘항주라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즐기면서 살아가는 행복한 생활’로도 읽힐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시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행복한 생활을 희구하는 바램을 일으키며 그러한 삶을 동경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이 시는 그저 인생을 찬미하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일 뿐이다. 이때에는 첫 구 ‘山外靑山樓外樓(산외청산루외루)’는 그저 아름다운 시구의 하나가 된다. 서호 가의 어떤 유명한 음식점에 이 시구에서 따온 ‘樓外樓(루외루)’라는 간판을 내건 것도 그렇게 본 것이 아니겠는가.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중어중문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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