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物語]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와 도공 박무덕
[유주열의 동북아物語]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와 도공 박무덕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전 나고야총영사)
  • 승인 2018.04.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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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전쟁

16세기 말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수많은 전쟁포로와 기술자를 납치해 갔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포로들은 쇄환되어 돌아왔으나 기술자들은 돌아 올 수 없었다. 그들은 조선의 선진 기술을 강제 이전시키기 위해 잡혀갔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의 남쪽 가고시마(鹿兒島) 근처로 납치 이주된 도공(陶工)들도 돌아오지 못한 기술자 집단이었다. 당시 일본 내에 황금보다 귀하게 취급된 조선 백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 집단을 납치해 온 가고시마 영주(大名)는 도공들이 조선의 백자를 만들 수 있도록 최대의 배려를 했다. 도공들이 조선에서 하던 대로 조선의 이름도 그대로 쓰게 하고 집이며 음식이며 복식 등도 조선과 똑같이 해 주었다.

심지어는 도공들이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는 조선식 사당도 짓도록 했다. 그리고 이 도공 마을에는 기술 유출을 우려하여 일본인이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도공들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결혼도 마을 내 조선인끼리만 통혼토록 하는 등 완전히 고립시켜 조선 백자만 열심히 만들도록 했다. 수백년간 철저히 관리한 결과 가고시마의 사쓰마(薩摩)도자기는 일본 국내뿐만이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조선도공이 가고시마 지방재정 수입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러나 1868년 명치유신으로 지방 영주제가 폐지되고 천황중심의 중앙집권화된 일본은 별도로 도공촌을 보호할 필요가 없게 됐다. 과거와는 달리 도공의 자녀들도 도공직을 세습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본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제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출신의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 사족(士族)(우리의 양반)의 성이 필요하게 됐다. 조선도공 박수성은 총명한 아들을 위해 도고(東鄕)라는 일본 성(姓)을 얻어내었다. 그의 아들 박무덕(朴茂德)은 동향무덕(東鄕茂德)(도고시게노리)로 바뀌었다. 무덕(茂德)의 나이 5세 때인 1887년도였다.

도고시게노리가 된 박무덕

한국의 핏줄 박무덕 즉 ‘도고시게노리’는 총명하여 가고시마의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교시절에 그가 좋아했던 독일어 선생의 영향으로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독문과에 입학한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치루는 1904년도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명치학원의 독일어 선생을 하면서 외교관의 꿈을 키웠으나 시험에 번번이 실패하다가 5번째 시험에서 겨우 합격한다. 대학 졸업 후 5년째가 되는 1912년으로 무덕(茂德)의 나이 30의 늦깎이였다.

1913년 그의 첫 해외 공관 부임지는 중국 봉천(奉天)(지금의 瀋陽)총영사관의 영사관보(지금의 부영사)였다. 외교관이라면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유럽, 미국지역이 아니고 자기 전공과 직접 관계없는 일 많은 중국의 공관에 배치됐다. 당시 봉천(奉天)은 일본이 합병한 조선과 가장 밀접한 중국의 거점도시로서 수도 북경(北京)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았다. 당시 일본의 대륙 진출정책에 호응하여 많은 일본상인들의 거류민이 계속 늘고 있었다.

거류민이 현지 중국인과의 다툼이 있어도 영사재판권을 가진 일본 영사들이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 봉천에는 나라 잃은 조선인들도 많이 살았으나 조선인은 현지 중국인으로부터 “까오리”(高麗)로 불리면서 가장 천시 받는 민족이었다. 자신이 그러한 까오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무덕은 괴로워했으나 내색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박무덕은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중국지역에는 더 이상 근무하지 않았다.

무덕에게 전공인 독일어를 쓸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1916년 일본은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공사관(지금의 대사관)을 개설하게 됐다. 스위스는 여러 개의 지방정부(캔톤)가 연방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며 통용 언어도 지역에 따라 불어, 이탈리아어, 독일어가 쓰인다. 박무덕이 스위스에서 공관 개설요원으로서 활약한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했고 봉천(奉天)에서의 암울한 시절을 훌훌 털어 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얻은 사랑

그리고 3년 후 주독대사관에 부임했다. 1919년 박무덕이 베를린에 부임할 당시는 독일제국이 세계1차 대전에서 패배하여, 쓰러진 거인처럼 제국은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된 때였다. 대제국 독일은 본래 여러 개의 독립국가로 나뉘어져 있던 유럽의 후진국이었다가 비스마르크 같은 대정치인과 빌헬름 1세와 같은 국왕이 나타나 독일을 통일 프로이센제국을 세운다. 빌헬름 1세는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에게 승리하여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자만이 지나쳤을까 세계1차 대전에서 연합군에 패배 해외식민지도 빼앗기고 전쟁 배상금 지불로 나라의 존위가 위태로웠다. 1919년 독일의 공화혁명이 성공하고 빌헬름1세의 손자 빌헬름2세는 황제직을 퇴위 당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박무덕이 독일에서 본 이러한 상황은 26년 후 그가 일본의 외상이 됐을 때 일본의 상황과 비슷했다. 일본 역시 아시아의 후진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같은 재상과 메이지(明治)천황을 만나 중국(淸)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 승승장구하다가 결국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무덕은 이러한 독일 근무에서의 학습효과로 1945년 외상으로서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천황에게 건의할 수 있었다.

무덕이 베를린 근무에서 얻은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독일 여인의 배우자를 얻었다. 그녀는 일본 고베에서 세 딸과 행복한 생활을 하던 중 남편이 요절하면서 고향 베를린으로 돌아와 일본대사관의 현지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건축가 게오르그(Georg de Lalande)로 베를린공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동아시아에 흥미를 가져 중국 상하이와 당시 독일 조차지였던 산동성 청도(靑島)에서 일하다가 1901년 고베에서 건축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고베에는 그의 작품이 다수 남아 있다. 게오르그가 요절하게 만든 것은 공교롭게도 서울(당시 경성)의 매서운 추위였다. 게오르그는 조선총독부 건물의 기본 설계를 맡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네오 클래식스타일의 건물을 설계했다. 그는 설계를 위해 노무라 이치로 등 일본인 조수와 함께 자주 서울출장을 하게 되고 서울에서 폐병을 얻어 목숨을 잃는다. 1914년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 후 조선총독부의 설계는 그의 조수 노무라 이치로에 의해 완성되어 1916년부터 동대문 밖의 화강암을 가져다가 공사 진행을 시작하여 1926년 10년 만에 완공한다. 게오르그가 설계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신축된 지 70년 만에 철거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무덕은 독일인으로서는 드물게 유창한 일본어를 쓰는 상냥한 독일 미망인에게 끌렸다. 1921년 베를린대사관의 임기를 마친 무덕은 사랑하는 독일 여인과 귀국하여 외무성 선후배의 축복을 받으며 동경(東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40세 만혼의 신랑이었다. 당시 일본은 다이쇼(大正)의 자유분방한 시대로 외국인 미망인과의 결혼도 축복받는 분위기였다. 무덕이 다음해 외무성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두 사람의 유일한 혈육인 딸이 태어난다.

주독대사와 오시마 무관

1926년 박무덕 부부는 딸과 함께 워싱턴 주미 대사관에서 3년간 근무한다. 그리고 귀국했다가 곧 바로 베를린의 독일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전보된다. 독일은 바야흐로 히틀러의 나치당이 세력을 키우고 있는 어수선한 때였지만 박무덕 부부는 금의환향의 즐거움에 푹 빠진다. 특히 오랜만에 게오르그와 사이에 둔 자녀들과 해우의 시간이기도 했다. 박무덕 참사관은 독일생활 3년 후 제네바의 군축기구 일본대표부의 사무국장을 역임했다가 구미국장의 보임을 받아 외무성으로 귀임한다. 1933년 가을이었다.

구미국장을 끝으로 1937년 박무덕은 주독대사로 발령된다. 중국에서는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독일은 베를린 올림픽을 성공시킨 히틀러의 야망이 깊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독일어에 능통한 대사와 독일여자인 대사부인의 베를린부임은 한동안 외교가의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들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군부는 독일 육군과 깊은 유대를 갖고 싶어 했다. 박무덕은 군인이 아니다. 동경대(東京大)캠퍼스에서 리버럴한 교육을 받은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인으로 군부의 입장을 속 시원히 들어 줄 수 없었다. 오히려 나치 히틀러를 추종하는 군부의 입장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부하 오시마(大島)육군무관이었다. 오시마는 독일의 리펜드로프 같은 히틀러 심복(후에 외상역임)과 교우하고 이미 히틀러와도 사석에서 만나는 등 독일 군부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군부로 보아서는 오시마 같은 인물이 필요했다.

마침 주소련 대사였던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가 외상으로 발탁되어 주소대사가 공석이었다. 시게미츠는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 시 주중국 공사로 천장절 행사에 참석했다가 폭탄에 한쪽 다리를 잃은 인물이다. 군부가 외무성에 압력을 넣어 박무덕을 주소대사로 전출시키고 오시마를 일약 주독대사로 승진시켰다. 오시마 대사는 나치보다 더 나치적이라고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일본대사라기 보다 독일대사처럼 활동을 했다.

박무덕의 능력은 소련에서 발휘됐다. 1939년 만몽(滿蒙)지역의 노모한에서 관동군과 소련군과의 접전에서 관동군이 크게 패배한 사건이 있었다. 전임자인 시게미츠대사가 해결 못한 일을 박무덕은 해내었다. 소련외상 모로도프와의 개인적 신뢰로 포로교환 등 양국의 현안을 해결했다.

평화신봉자로 태평양전쟁 마무리

이러한 성과로 1941년 성립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내각의 외상에 발탁된다. 그 해는 미일(美日)교섭이 결렬되어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이루어진 해이다. 평화주의자였던 박무덕이 전후 극동전범재판에 피의자로 소환되고 20년의 금고형을 살면서 1950년 7월 황달로 감옥에서 병사하게 된 것도 도조내각의 외상으로서 개전에 대한 책임이었다. 박무덕은 도조와의 케미가 맞지 않아 1942년 사임한다.

1944년 4월 박무덕은 종전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스즈키 내각의 요청으로 두 번째로 외상을 맡는다. 전후 처리를 염두에 둔 스즈키(鈴木)총리는 평화주의자 박무덕을 적임자로 판단한 것이다. 박무덕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으로 일본의 패전이 임박했음을 직시하고 가급적 일본의 유리한 방향에서 항복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두 번째의 외상 재임 중 비서관으로 후에 자신의 성(姓)(東鄕)을 이어 받은 데릴사위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를 임명한다. 후미히코 비서관은 무덕의 딸과 1943년에 결혼했고 본명은 혼죠 후미히코(本城文彦)였다. 동경제대 법문학부를 졸업 외무성에 입부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 후미히코는 하버드대학에 연수중에 미일 개전으로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귀국하여 박무덕의 사위가 된다. 도고 후미히코는 전후 주미대사와 외무차관이 된다. 그는 전쟁 중 피난지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쌍둥이 아들을 얻는다. 쌍둥이 아들 중 하나가 외무성에 입부하여 구아국장이 되고 주화란대사를 역임 한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다. 정유재란 때 피랍되어 일본 사쓰마 도자기의 창시자가 된 박평의(朴平意)를 직계 할아버지로 두고 살아온 박무덕 3대는 일본 외교관의 직업으로 연결됐다. 특히 선조의 나라를 강점한 일본의 외상으로서 평화만이 살길임을 주장한 박무덕의 일생도 난세에서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되돌아보면 아버지 박수성이 도고라는 사족의 성을 얻지 못했다면 박무덕은 조선 도공의 후예로서 도자기 굽는 일로 일생을 마감했는지 모른다. 대일본제국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의 삶과 조선도공 박무덕의 삶 어느 쪽이 좋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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