應憐屐齒印蒼苔(응련극치인창태, 나막신이 푸른 이끼에 자국을 내는 것은 안타깝기 마련)
小扣柴扉久不開(소구시비구불개), 설핏 잠가놓은 사립문은 오래도록 열릴 줄 모르네)
春色滿園關不住(춘색만원관부주, 봄빛이 뜨락에 가득하니 가두지도 못해)
一枝紅杏出牆來(일지홍행출장래, 붉은 살구꽃 한 가지 담을 넘어 나오네)
정원이 잘 가꾸어진 친구의 집에 봄을 즐기러 갔으나 친구의 집 대문에는 빗장이 걸려 있다. 혹시나 하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어디로 갔는지 친구는 돌아오지 않는다. 봄기운을 만끽하리라 잔뜩 기대를 하고 온 작자는 여간 서운하지가 않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작자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면서 친구의 집을 한 번 휘둘러본다.
그 때 친구의 집 담 너머로 붉은색 살구꽃 한 가지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작자의 마음은 금세 희열로 충만해진다. 그 꽃 한 가지만으로도 친구 집 정원에 가득한 봄날의 화사함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뜰 안 가득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보았더라면 오히려 버거운 느낌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친구를 만나지 못한 것이, 그래서 봄꽃이 만개해 있을 정원을 다 보지 않은 것이 도리어 봄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문이 잠긴 집의 담 너머로 살구꽃 한 송이가 나와 있는 모습을 ‘빗장으로 잠그고 담을 둘러쳐도 넘쳐나는 봄기운을 막지 못해 담 너머로 삐져나왔다’고 한 시인의 표현이 기발하다.
남송(南宋)시대에 자연을 주로 노래했던 강호파(江湖派) 시인에 속하는 섭소옹(葉紹翁)이라는 시인의 작품이다. 제목은 ‘정원에 놀러 갔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함’이라는 뜻의 <유원불치(遊園不値)>로 되어 있다.
봄날의 설렘과 봄꽃의 감동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운 시는 금세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명시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자 이 시 속의 ‘붉은 살구꽃이 담 넘어 나온다’라는 뜻의 ‘홍행출장(紅杏出牆)’이라는 어구는 성어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홍행출장(紅杏出牆)’이라는 성어가 이 예쁜 시에서 나온 만큼 그 뜻은 ‘충만한 봄기운’이거나 ‘봄꽃의 아름다움’ 정도가 되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성어로서의 ‘홍행출장(紅杏出牆)’은 전혀 다른 뜻을 담고 있다. 여자 특히 유부녀가 바람이 난 것을 두고 ‘홍행출장(紅杏出牆)’이라고 한다.
봄날의 정경을 맛깔스럽게 읊은 시에서 나온 ‘홍행출장(紅杏出牆)’이라는 성어가 바람난 유부녀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컬하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혀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예쁜 여인을 꽃에다 비유하는 것은 흔한 관행이므로, 꽃이 담 너머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예쁜 유부녀가 담 너머를 기웃거리는 것을 연상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앙증맞고 예쁜 살구꽃이니 단아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여인의 분위기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살구꽃이 담 너머로 나와 있는 모습은 그 예쁜 여인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갈구하는 모습과 닮았다고도 할 만하다. 누구나 탐을 낼만한 예쁜 여인이 바람이 났으니 이 또한 얼마나 파격적이며 에로틱한가? 그래서 담 너머로 비쭉 내민 예쁜 살구꽃은 얄궂게도 남편의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색정녀의 이미지가 되는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