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우의 문학 산책] 역설의 문학, 최명희의 ‘혼불’··· 그리움 두고 그리움 찾아 떠나는 노래 
[장인우의 문학 산책] 역설의 문학, 최명희의 ‘혼불’··· 그리움 두고 그리움 찾아 떠나는 노래 
  • 장인우<순천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8.04.19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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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 지나고 / 다시 보게 되는 그날
모든 걸 다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 남은 길을 가리라는 걸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 이 사랑 녹슬지 않게 늘 닦아 비출께요

취한 듯 만남은 짦았지만 /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데도 후회하진 않죠 / 영원한 건 없으니까
운명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하고픈 말 많지만 당신은 아실테죠 / 먼 길 돌아 만나게 되는 날 다신 놓지 말아요
이 생애 못한 사랑 이 생애 못한 인연 / 먼 길 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
- 이선희 「인연」

나, 이제 갑니다. 열여섯 적 당신을 만나러 고희를 넘긴 일흔셋, 이제야 모든 것 내려놓고 당신 곁으로 갑니다. 꿈만 같습니다. 인월, 그 사람은 제게 ‘소멸’을 말했습니다. 혼례를 치르던 날 밤, 사모관대도 벗지 않고, 자색 단령 자락 ‘휙’ 소리를 내며 방문을 나섰던 기서가, 매안조차 들르지 않고 경성으로 떠나버린 뒤, ‘기다림’ 속절없는 기다림은 그 사람의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둡고 습한, 북쪽으로 난 방 안에서 말 한자리 나눌 사람조차 없이 베틀에 앉아, 각시 복숭아 꽃잎 개울에 날려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무섭게 적막한 밤을 보내던 인월, 그 사람,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잘라 내자. 원도 한도 없이 잘라내자. 마음이 지닌 모든 집착을 버리고, 버려서 끝내는 다시 태어날 인연을 남기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불쌍헌 사람’

그 사람을 두고 갑니다. 만류, 그 간곡한 만류를 마음 깊은 곳에 남겨두고 열여섯 손을 흔들고 떠나던 당신을 향해 내가 갑니다. 이준의, 사무치게 그리운 이름, 소리 내어 부를 수 없는 이름, 가슴 밑바닥 깊은 곳으로부터 수도 없이 부르던 이름, 그 이름, 청암양반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 부르지만, 불러도 불러도 뼈마디에 새겨질 뿐 손에 만져지지 않는 그 이름을 찾아 내가 갑니다.

열아홉에 소복 입고, 홀로 텅 빈 집에 신행을 오던 날, 많이 울었습니다. 곱고 앳된 신랑, 매안으로 돌아갈 때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어 많이 울었습니다. 

친정에서 떠나기 하루 전 날, 당신은 참으로 딱하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마치 내가 누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매달려 울었습니다. ‘하룻밤만 더 재워 달라고, 하룻밤만 더 있다 가게 해 달라’ 고 어린아이 응석 부리듯 하는 당신을 어르고 달래어 기어이 보냈습니다. 가슴이 미어지고 쓰라렸지만, 반가의 도리라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위로 층층이 어른이 계시고 남의 이목도 번다한데… 뒷모습이 그렇게도 측은하여 산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 그날, 그날 하루만 피했어도, 그토록 허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인데.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준 단 한 가지 정표마저 논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자부의 폐백조차 살뜰히 받지 못한 채 떠나신 시부님, 그 허망한 자리를 메우고 종가의 종부로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함 속에 든 형형색색의 비단들을 돈으로, 논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한평생 그 무엇으로도 당신의 정표에 대한 그리움, 허망함은 메울 수 없었습니다. 

“내 이제 죽어 육탈(肉脫)이 되거든 합장(合葬) 하여 달라” 말을 남겼습니다.

마중 나오십니까? 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 적막한 길, 혼자서 가는 먼 길, 먼저 간 길을 나중이라고 못 가겠습니까마는, 마중이라도 나와 준다면 너무 늦게 왔다 타박이 적을 것 같아, 청해 봅니다.

아직 곱습니다.

세월이 흘러 50년이 다 되었어도 녹원삼(錄圓衫), 휘황한 그 빛은 선연하여 조금도 바래지 않았습니다. 초록 몸바탕에 너울같이 넓은 색동 소매, 진홍, 궁청, 노랑, 연지에 연두, 다홍을 물리고 부리에는 눈같이 흰 한삼이 드리워진 색동 소매, 흰색 안감을 받친 푸른 비단 다섯 폭 치마, 그 위에 꼭두서니빛 다홍치마를 입고, 속적삼 위에 분홍색 속저고리와 노랑 삼회장 저고리, 초록색 곁마기 끼운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주홍 산호, 노란 밀화, 물빛 비취, 붉은 유리, 푸른 구슬들을 한 줄로 꿰어 세우고, 앞,뒤쪽에 진주광택이 나는 등황색 석웅황이 갸름하게 가로 놓인  족두리를 썼습니다. 

분 향기 머금고 혼서지(婚書紙) 배접하여 만든 신발도 신었으니, 거부할 수 없었던 인연, 거부할 수 없었던 운명을 안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 당신 곁으로 갑니다. 다신 나를 놓지 말아요. 

[필자소개] 
전라북도 정읍 태인생, 순천시 거주
순천문인협회, 팔마문학회 정회원,
전남교육청 학교폭력방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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