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物語] 청일전쟁과 슌반로우(春帆樓)
[유주열의 동북아物語] 청일전쟁과 슌반로우(春帆樓)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전 나고야총영사)
  • 승인 2018.05.0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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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왕과 나’

얼마 전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지역구인 시모노세키(下關)에 다녀왔다. 메이지 유신 150주년 기념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금년(2018)은 일본 메이지 유신 150주년이 된다. 메이지 유신은 미국 매튜 페리(1794-1858) 제독이 이끄는 흑선(黑船 구로후네)에 의해 촉발됐다.

1853년 6월 흑선의 내항에 당황한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막부는 미일 통상조약(1858)을 맺는 등 문호개방에 힘쓰지만 막부를 반대하는 도막파(倒幕派)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막부파와 도막파의 끈질긴 내전 끝에 1868년 5월 도막파의 에도 무혈입성으로 막부는 전복되고 왕정이 복구된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도막파는 중국(淸)이 영국 등 서구 열강에 의해 분할되는 것을 보고 일본이 똑같은 운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서양화를 서둘렀다. 미국 영화 ‘왕과 나(King and I)'에서 샴(타이)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왕이 후궁들에게 드레스를 입게 하고 왕자들에게 영어 교육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메이지 정부는 녹명관(鹿鳴館)이라는 사교장을 만들어 귀족들은 양복을, 부인들은 롱 드레스를 입고 서양인들과 춤을 추도록 했다. 달력도 양력으로 바꾸었다. 상복(喪服)도 과거 흰색에서 서양식인 검은 색으로 바꾸었다. 결혼한 부인이 자신의 성(姓)을 버리고 남편의 성씨를 따르게 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서구 열강은 일본을 더 이상 야만국이라 할 수가 없게 됐다. 일본은 동양이지만 행동은 서양화하여 식민지 지배의 핑계를 빠져 나갔을 뿐만이 아니라 모방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시모노세키의 슌반로우(春帆樓)

메이지 정부는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적 정부형태를 만들어 나가면서 대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섬나라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한반도와 중국대륙 진출을 도모했다. 1592년의 임진왜란도 ‘정명가도(征明假道 중국을 정복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의 명분으로 시작됐다.

한편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는 등 한반도를 통해 태평양으로 나오고자 했다.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조선을 자신의 세력 하에 두기 위하여 한일수호(강화도)조약(1876)으로 조선에 접근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청국과의 마찰은 불가피했다.

1884년(갑신년) 조선에서는 김옥균 등 친일인사에 의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나 조선에 주둔중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국의 세력에 의해 진압된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갑신정변 수습과정에서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해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파병 시는 서로 통보한다는 텐진(天津)조약을 1885년 맺는다. 1894년(갑오년)에 조선에 동학농민운동(東學亂)이 일어났다. 조선 정부는 동학난을 막지 못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도 군대를 파병한다. 청일 양국은 인천 근처에서 충돌 예고됐던 청일전쟁이 일어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시모노세끼(下關)는 일본의 관문이다. 일제강점 시대부터 부산과 연결되어 왔으며 지금도 부관(釜關) 페리가 다니고 있다. 시모노세키는 바칸세키(馬關)라고도 불린다. 12세기 말 일본 중세 무사(武士)들의 난(源平戰)에 휘말린 어린 국왕 안도쿠(安德)가 근처의 단노우라 해전에서 익사했고 그 후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이 세워졌다.

붉은 색깔의 신궁은 안도쿠가 머물고 있으리라는 용궁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 후 이곳의 세키쇼(關所 세관과 검문소)를 아카마가세끼(赤間關)라고 불렀고 이것이 와전되어 아카마가세키(赤馬關), 이를 줄여 바칸세키라고 불리는 유래이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청국은 강화를 원했다. 청일 양국은 1895년 3월 시모노세키에서 청일전쟁을 종결짓는 강화회의를 열었다. 시모노세키는 실력자 이토의 고향인 야마구치의 하기(萩)에서 가깝다. 회담장은 뜻 밖에 ‘슌반로우’라는 이토가 단골로 찾아가는 복어요리 전문의 작은 요정이었다. 이번에 가 보니 슌반로우는 강화회의 자료관이 됐고 인근에는 같은 이름의 복어전문 레스토랑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본래 후지노라는 안과의사가 개업한 병원이었으나 그가 죽은 후 그의 딸이 고급 요정을 개업했는데 간몬(關門)해협의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위치로 이토 등 당대의 일본 정계인사들이 자주 들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토는 강화조약을 위해 이 요정에서 청국의 전권대표로 리훙장(李鴻章)을 맞이했다.

‘1억 량의 총알 값’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모노세키를 찾아 온 리홍장에게는 굴욕적인 강화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오둥 반도와 타이완 등 영토할양과 은 3억 량의 배상금이었다. 은 3억 량은 당시 청나라의 4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일본은 대군을 산하이관(山海關)에 집결시켜 베이징(北京)공략을 앞두고 있어 청국에게 항복 같은 강화 조건을 제안했기에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리홍장은 영토할양은 언어도단이고, 배상금도 1억 량이 최대한이라고 버텼다.

일본의 여론은 강화조약을 반대했다. 중국과 강화회담을 할 것이 아니라 베이징으로 바로 진격하여 30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원했던 중국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시모노세키 주민들도 강화회담은 필요 없으니 리홍장은 돌아가라고 아우성을 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회담이 시작된 나흘 만에 슌반로우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숙소 인죠지(引接寺)로 돌아가는 노상에서 리홍장에게 한 발의 총알이 날라 왔다. 인죠지는 시모노세키를 경유하는 조선 통신사의 숙소로도 제공된 유서 깊은 절이다.

1895년 3월 24일 오후 4시였다. 다행히 총알은 리홍장의 눈 밑에 박혔다. 피가 온 얼굴을 덮었다. 순간 리홍장은 ‘이 피가 조국을 살리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행히 총알이 리홍장의 시신경도 훼손하지 않았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일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청일전쟁 당시 히로시마에 설치되어 있던 대본영의 메이지(明治) 일왕은 크게 놀라 어의를 보내고 리홍장에게 깊은 사과와 함께 위로를 전했다. 이 사건을 핑계로 리홍장이 회담을 결렬시키고 귀국해 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대국을 가지고 논다고 불만을 가진 서구 열강이 간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을 일본 정부는 우려했다.

총상에서 가까스로 회복한 4월 일본은 리홍장에게 ‘총알 값’으로 1억 량을 깎아주어 배상금 2억 량으로 회담 종결을 제안했다. 우여곡절 끝에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강화조약 제1조는 조선의 독립자주국임의 선언이다. 일본은 조선이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끊어 놓고 기회를 봐서 조선을 삼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일본은 조선의 침탈 과정을 착착 밟아 10년 후인 1905년 11월 덕수궁 중명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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